사이즈의 충격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by easygoing

어릴 때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영웅문은 왼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21세기 현재 정식 명칭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나무 위키를 뒤져보았다. 800만 부를 팔았다는데 놀라고, 발간된 해에 어머니가 본인이 보려고 구입하셨다는 것에(어머니의 책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놀라고, 실체가 해적판이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김용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장국영, 주윤발, 유덕화 등등보다 훨-씬 나중에 알았는데 국적만 중국일거야. 뭐 그런 식으로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삼체/ 류츠신


사이즈가, 트리플 엑스라지를 넘어 아웃 오브 컨트롤 라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이야기도 주인공을 여기까지 밀어붙인 경우는 없었다. 은하영웅전설이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이 책에 비하면 15박 17일 유럽 8개국 단체배낭여행 수준이다.


빈 서판 읽는데 이틀 걸렸는데 이 책 3권을 읽는데 4일이 걸렸다. 이공계 출신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초끈이론이 나왔을 땐 훗- 하고 슝 지나갔다. "그러니까 3K 우주 배경 복사의 전체적인 등방성 파동을 보고 싶습니다. 진폭은 100분의 1에서 100분의 5 정도로요." 어? 일단 멈춘 후 각주를 찾고 세 번 정도 앞뒤 양옆으로 왔다 갔다 한 후 OK 다시 출발. 하지만, 36제곱킬로미터의 땅 위에 깃발을 든 진시황의 군사 3000만 명을 세워 컴퓨터 메인보드를 만드는 장면에 도달했을 때는 그야말로 긴 휴식이 필요했다.

지구 위에서 60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1권은 인트로에 불과하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확장되는 2권을 지나 1권 첫 장 제목인 '물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3권을 읽다 보면 책 속 대사가 계속 떠오른다 "당신은 정말 악마군"


동양적 SF라는 말, 중국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말. 뻥이 아니다. 읽다 보면 내가 동양사람이구나 느끼게 된다. 공자, 맹자, 장자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는 절대적 과장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반복해서 읽고, 거꾸로 읽어 봐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내가 이해력이 좀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번역의 기준은 언제나 중2 아닌가? 원기둥, 원추, 구에 대한 번역자의 구분이 정확했는지,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공간이나 물체에 대해 묘사된 부분들이 빠짐없이 정확하게 번역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총 3권짜리라고 생각하고 빌렸는데 한국어판 1권은 2013년, 2권은 2016년, 3권은 2019년 발행이다(중국 원작은 2007년~2010년). 이 부분이 가장 좋았다. 이걸 한 번에 읽을 수 있었다니. 테드 창의 17년을 1년 반으로 겪었던 때와 함께 행운의 기억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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