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작의 세계

흔한 지구인의 흔한 비참함

by easygoing

어릴 때 나는 남의 집에 가면 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의 유무를 살피고 열었을 때 쩍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내가 '와 이 집엔 책이 많네~'라고 운을 띄웠을 때 번호 순서가 한두 개 흩트려져 꼽혀있는 집 사람들은 빌려주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뒤죽박죽인 집은 책을 골라주거나 반납 일정을 정해주었고, 완벽한 순서로 꼽혀있는 집은 (새 거라고 손대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께) 물어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전집들을 중학생 전후로 읽었는데 그때 '명작이라는 것은 정말 길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엄청 빠르게 읽히도록 쓴 것을 뜻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20대 때는 민음사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둘 다 사서 꼽아두는 게 꿈이었는데 이 책이 무려 135번이다. 찾아보니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191번 까지 나왔다. 민음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 2 373번. 끄응;


어디에선가 적어놓은 메모를 보고 별 생각 없이 빌려왔다. 원작은 물론 번역도 대단하다. 끈적끈적한 비극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다. 빨리 읽고 치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집요하다. 숨그네랑 비슷했다. 권태가 찾아와 고통이 필요할 때 꺼내 들고 아무 데나 펼치면 된다.




노멀 피플/ 샐리 루니


핑크하트 키스쪽쪽의 연애담을 마주할 때마다 처절한 소외감을 느껴온 나는 이 책이 꽤나 지긋지긋하고 좋았다. 생각이 많고 자아가 강한 사람의 짝짓기는 이런 식이다.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두고 무책임한 자신에게 관성을 부여하려 애쓰다가 나의 추잡한 바닥을 본 건 너뿐이라며 의리에 호소하고는 너를 떠나겠다고 말하면서 나를 떠나는 것으로 종결.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오빠와의 알콩달콩 밀당 선물 이벤트 이런 거. 나만 없는 게 아니었다.


최고의 역작이라는 서평을 봤다. 역시 명작은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빠르게 읽히도록 쓴 것이 맞다. 그런데 내가 중고등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실직-연애-결혼-육아-가사-노화를 통과하는 동안 남들과 똑같이 겪은 흔한 희로애락들이 모조리 디테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때 읽은 세계명작들을 다시 읽기 두렵다는 말이다. 책장에서 나를 노려보는 수백 권의 세계문학전집이라니. 아...그런 일은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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