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sygoing Feb 21. 2022

알레르기

아나필락시스로 죽을 수도 있지만 또 뭐 못 사는 것도 아니니까

 주변 사람들은 몸에 이상이 있으면 일단 나에게 물어본다.


 내가 아직 안 걸려본 병이라고는 치질이랑 무좀, 내성발톱 정도.


 어릴 때는 '생기다 만 년'

 컸을 때는 '걸어 다니는 시체'

 성년 후로는 '알레르기 베타테스터'로 불렸다.


 현재 나에게 가장 격한 알레르겐은 키토산

익으면 빨갛게 되는 것

갑각류다.


 20대 초, 돈을 벌 수 있게 된 후로 신사동 프로간장게장의 테이블 몇 개 정도는 내 돈이라고 할 정도로 간장게장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친구들과 금요일 밤에 가서 먹고, 주말에 가족들이랑 또 먹으려고 포장을 해 왔다. 토요일 오후 아빠랑 엄마는 나가셨고 동생들도 집에 없는데 저녁까지 기다리기가 무료하여 조금만 미리 먹겠다고 게장 국물에 밥을 살-짝 비벼 먹었다.


 배를 두드리며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졸음이 왔다. 졸리다기보다는 약간 몽롱~해지는 것이, 눈이 좀 침침하네 싶어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거울을 보니 얼굴이 부었다. 뭐 나는 항상 부어있다. 누워있어서 그런가 보다 방에 돌아오는데 다리가 이상하다. 근질근질한 것 같고 멍멍하고. 보니 다리가 부었는데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뭐지? 근데 가렵지는 않네? 하고 조금 긁어봤다. 손톱이 지나간 길을 따라 부풀거나 빨갛게 되지 않았다. 그냥 부었나 보다 하고 잠시 후에 좀 나아졌나 봤더니 막대풍선 같은 붓기가 발끝을 향해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 들어온 막냇동생에게 '야 나 다리 좀 이상하지?' 물었더니 '언니 얼굴이 더 이상해'하고 말해서 거울을 보니 눈코입이 파묻혀 있다. 이건 꿈인가? 정신이 멍해졌다. 집 옆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부푼 팔다리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들어갔다.


 서류 작성하고 대기실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의사가 한 명 오더니 '내 말 들려요?' 하고 물었다. 어우 오늘은 대기가 엄청 짧네. 좋아서 '네' 대답했는데 '숨 쉬어져요?'라고 물었다. '네? 네~' 했더니 갑자기 우당탕 나를 끌고 침대에 눕히더니 호흡기를 꼽고 언제부터 이랬냐, 약 먹었냐, 뭐 닿았냐 질문을 퍼부었다. '글쎄요~ 한 1시간인가 2시간 전에 다리가 붓더니 이래요. 약은 뭐 먹은 거 없고...''그게 몇 시인지 기억해요?' '글쎄요, 게장 먹은 후니까 2시 이후긴 한데''게장이오?''네' 그리고 또 우당탕하더니 모두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뭔지도 모를 주사를 꼽고 살짝 잠이 들었는데 의사가 나를 깨웠다. '게장 드시지 마세요, 죽을 수도 있어요.' 엄청 무서운 얼굴로 말하고 가버렸다. 무슨 소리가 왜 저러나 하고 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오더니 '이제 괜찮아졌어요.' 했다. '뭐가요?' 물었더니 '이제 숨 쉬는 거 편하시죠? 큰일 날뻔했어요. 게장 드셨다고요?' '네, 근데 저 게장 어젯밤에 사 온 거 김치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은 건데 상했을 리가 없는데요' '그래요? 아 그래도 상했었나 봐요..''그럴 리가 프로간장게장이 그럴 리가 없어요!' '아, 프로간장게장 맛있죠?''맞아요 진짜 맛있어요' 웃으며 헤어졌다.


 연락받은 엄마가 오셨다가 나도 아침에 먹었으니 주사 맞아야 한다며 수액을 맞으셨다. 그 게장 못 먹는 건가 낙심하고 있는데 간호사 선생님 한 분이 살짝 오셔서 물었다. '많이 드셨어요?' '아뇨 아껴먹는다고 국물만 조금...' '많이 남았어요?' '네...' '아이고...' 하더니 저쪽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많이 남았데!' 하고 던졌다. 그쪽 선생님들이 '아- 어떻게... 많이 남았데, 아 아까워라..'하고 단체로 안타까움을 전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아빠가 '내가 그거 먹어 없애버렸으니까 걱정 마.' 하셔서 큰 위로가 되었다. 막냇동생의 말에 따르면 내가 응급실 갈 때 제대로 못 걸어서 자기가 부축을 해서 갔고 의사 질문에 웅얼거리며 자꾸 졸더니 의자에서 고꾸라졌다고 한다. 내가 한 대답들을 의사들은 다 알아들어서 놀랐단다.


키토산에 의한 아나필락시스 쇼크였다.

가족들은 내가 게를 너무 많이 먹어서 게들이 신을 찾아가 쟤 좀 어떻게 해 줘라 민원을 넣은 거라는 괴담을 유포했다.

 생각해 보면 그전에도 좀 붓긴 했는데, 항상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진탕 놀고 집에 오기 전에 게장을 먹고 돌아오는 코스여서 술독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최애였던 게장을 못 먹게 되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외래를 가서 물었더니 알레르겐은 수도 없이 많다. 가벼운 배앓이나 가려움으로 끝나서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컨디션에 따라 강도 차이가 심하므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설명했다. 조용하다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폭발하는 건데 상황 조합에 따라 변수가 많아서 그냥 평소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단다.


 또 하나 격한 것은 이부부루펜계열 약물(대부분의 소염제에 들어있다). 

 성격이 삐뚤어져서 배가 아픈 건 줄 알았다.



 사실상 비염이건 아토피건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건 면역체계 문제인데 단순히 면역력을 키우면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커피를 마시고 유산소 운동을 하면 격한 편두통과 함께 구토를 한다. 운동 후에 마시면 샷 하나/하나 반까지도 전혀 문제없다. 특정한 꽃들이 피는 딱 그 기간에 방울토마토를 먹으면 기도가 부어오른다. 봄에 산과 들에 가면 두드러기가 나고 얼굴을 긁어대며 눈을 잘 못 뜬다. 그 기간을 빼면 전혀 문제없다. 이런 식이다.


 해결이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이면 간단하다.(한 대 맞으려나?)



 친가 쪽 유전자에 아토피가 들어있다. 우리 집안에서는 팔꿈치 안쪽에 피 딱지가 없으면 아토피가 아니다. 그냥 건조한 거지. 성장이 끝나면 많이 좋아진다. 조카들이 어릴 때, 명절에 만나면 서로 피부를 확인하면서 덕담을 나눴다. 라면이랑 피자랑 콜라 못 먹어서 속상하지? 우유 급식은 괜찮니? 그걸 다 참고 우리 둥둥이 멋지네~ 이런 식으로. 내 항렬들은 아토피라는 단어도 없었고 그냥 태열이라며 어른들이 소금을 발라라 된장을 발라라 침을 발라라 잘 씻어라 뜨거운 물로 튀겨라 등등.. 하드코어 한 기니피그 신세를 겪었던 터라 조카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런데 얘들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피자 치킨 라면 등등을 먹는 거다. '이제 안가려워?' 물었더니 웃으면서 '아, 이모 진짜 먹고 싶을 때는 그냥 먹고 좀 긁어요.' 했다.


애들이 나에게 자유를 줬다.


 쇼크가 왔을 때 바로 응급처치받을 수 있는 가까운 병원 위치를 확보해두면 죽지는 않는다. 주사 맞으면 바로 괜찮아진다. 괜찮다는 범위를 넓히는 게 핵심이다. 일상생활이 가능하면 괜찮은 거다. 좀 메스껍고 어지럽고 가렵고 아파도 '알레르기구나-' 알고 있으면 '지나갔구나-'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당신 표정이 왜 그래? 불만 있어?' 하기 전에 '아이고, 알러지~ 죽겄네~ 저 신경 쓰지 마세요~' 할 수 있다.


'너 뭐 잘못 먹었냐?'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못 먹으면 헛소리한다는 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나도 온갖 알레르기를 갖고 있으면서 바람결에 날아온 입자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땅콩 알레르기를 보고 '아, 어떻게 살아~'라고 엉뚱한 걱정을 했던 적이 있다. 선천성 대사이상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많고 모르고 먹인 분유 때문에 발달장애가 온 경우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들 잘 살고 있다. 다 방법이 있다. 좀 더 불편할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똑같다면 재미있는 걸 하나라도 더 하고 아픈 게 낫다.


 몇 년 전에 여수에 다녀왔다. 숙소는 응급실이 있는 병원 가까운 곳에, 날짜는 생리와 배란 기간에 겹치지 않게 선택했다. 일주일 전부터 컨디션 조절을 하고 모든 병원이 열려있는 평일 점심시간에 게장을 먹었다. 그날은 앞뒤로 커피도 주스도 안 마시고 생수와 흰밥만 먹었다. 얼굴이 약간(사진 보고 웃을 수 있는 정도) 붓는것으로 끝났다. 코로나 풀리면 또 갈 예정이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