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기 초보운전

부라더 zl-b950

by easygoing

시공간을 넘나드는 웹서핑으로 수 십 가지의 재봉틀을 머릿속에서 해체-조립하고 가격 차트와 향후 가치를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나에게 적합한 재봉틀을 구입했다.



아. 그런데 정말

재봉틀이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볼수록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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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6년 2월 제조. 몇 명인지 모를 주인들을 거쳐 나에게 왔다. 부드럽게 작동되고 소리와 바늘땀이 예쁘다.



이전 주인이 '재봉은 잘하시죠?'라고 물었다.
할 줄 모른다고 하면 안 팔까 봐(소심) 옛날에(큰애 아기 때) 언니네 놀러 가서
커튼 한 번 만들어 본 경험을 급히 소환하여
'다 잊어버렸어요.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죠~' 허풍을 떨었다.



책상 아래 놓아두고 쓸 때마다 꺼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무게가... 20kg 전후

계단에서 굴러 떨어뜨렸는데 계단만 깨지고 미싱은 멀쩡하다. 남편이 나르다 허리를 다쳤는데 아직도 낫질 않는다. 들지를 못해서 센터에 못 가고 출장 AS를 불렀다. 허풍인 줄 알았는데 그럴 만했다.


'아니 아니!! 허리가 아니라 대퇴사두를 써야지!'

'어허!! 코어에 힘주고 고관절을 접어야지!'

'원래는 86만 원짜리 최신형을 사려고 했어, 얼마가 이득이야!! 좀 참아!'

잔소리를 쉴 새 없이 날려 운송인(남편)의 불평을 잠재웠다.


책상 오른쪽 사이드에 두니 사이즈가 딱 맞기는 한데 시선이 자동으로 쏠려서 집중이 안 된다. 지금도 모니터와 재봉틀을 3초씩 번갈아 보고 있다. 시선강탈.



설명서

나는 전직 테크니컬 라이터이자 사용설명서 덕후다. 구입한 모든 제품의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고 모아둔다. 인터넷을 뒤져 누군가 스캔하여 pdf로 저장한 설명서를 찾아냈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수고가 제게 큰 기쁨과 행복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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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꽃님이 시집갈 때ㅡ! 이거 나르다가 새신랑 허리 나갈...

3가지 색상을 사용한 표지 디자인이 정말 다이나믹하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넘어지는 활동적인 꽃님이가 시집을 가서 친정엄마와 아빠가 우아한 자태로 재봉기를 고르고 계신다. 트렌치코트에 머플러, 롱부츠를 신은 저 뒤 모델 포즈 보소.

넘어지는 그림은 왜 넣었을까. 간첩 암호인가. 의아했지만 계속 보니 주황, 노랑, 백색이 골고루 들어가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 주고 있다. 디자인도 내용도 뭐 하나 빈틈이 없다!


내지

직선이랑 지그재그만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설명서에 장식 바느질, 오버 록크, 글자 및 자수 재봉 등등의 바느질 방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문체가 놀랄 만큼 간결하고 깔끔하다. '재봉기 운전 방법'이라고 쓰여있다. 손으로 방향을 조정하고 여러 가지 조절장치로 제어하며 발로 속도를 조절한다. 운전이 맞다. 초보운전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늘부터 나는 재봉기 초보운전 ㅎㅎ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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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서 표지에 사용된 노랑과 주황. 다 이유가 있었다. 케이스랑 톤 앤 매너를 맞춘 것이다.

손잡이 안쪽에 철제 프레임이 들어가 있고 플라스틱은 모두 하나의 주형 틀로 제작되어 있다(접합 없음). 쌓아 올리는 형식을 사용하여 뚜껑 부분의 수납을 최대화했고 손잡이와 걸쇠 부분은 철제 프레임을 안쪽으로 길게 넣어 나사로 결합했다. 앞으로 40년, 그 이상도 잘 쓸 수 있을 거다.





청소에 환장하는 나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모습.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때빼고 광내는 중이다.

재봉은 내일모레쯤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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