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과 무기력을 구분하는 일
찜질팩 만들다가 가방을 만들었다. 재미있었다.
더위와 폭우로 벼룩시장이 쉬면서 옷 만들기에 발을 들였다가
패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내 몸에 딱 맞고 내게 가장 잘 어울리며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곳을 뒤지고 파서 원피스 두 벌과 투피스, 셔츠, 플레어 치마를 만들었다.
이제 옷을 볼 때 디자인, 가격표, 원단 성분 외에도
재단과 재봉 방법, 사용한 실, 마감이나 부속품의 디테일
그러니까, 옷의 구조에 대해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옷을 왜 짓는다고 하는지 깨닫고 행복했다.
하지만
내가 만든 모든 옷들은
핏은 엄청 편한데, 디자인적으로 촌스럽고 밸런스가 안 맞았다.
패턴을 완벽하게 만들어도 원단과 재단 방법에 따라 다른 옷이 나온다는 것
옷은 걸어놓았을 때와 몸에 입었을 때의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문제는 벼락치기 공부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험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속상했다.
(그 시점에서 뜨개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솟았다. 실패의 경험이 쌓인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여행용 가방을 하나 만든 이후로
재봉기에 손을 안 대고 있다.
내 인생에 새로운 챕터가 열린 것은 매우 기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초보라 뭔 짓을 해도 완성도 없는 결과물 들만 줄줄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힘들었다.
사람들이 "못하는 게 없네요~" 할 때마다
"잘하는 것도 없어요~" 관성으로 답하다 보니
나는 정말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신통치 않은 결과를 마주했을 때, 적당히~ 이제 나는 이지고잉이야~ 하면서 멈춘 것 까지는 좋았는데
불안을 해소하고 싶은 생각에 자꾸만 종목을 바꿔가며 실패를 수집했다.
'아, 역시 또 못하네.' 이러면서 주섬주섬 배수진을 치고 있었던 거다.
이완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무기력으로 수렴했고
어느샌가 나는 또 침대가 아닌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겨울 서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봤다.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읽고 쓰는 것을 잘한다. 잘해서 좋아하는 건지 좋아해서 잘하는 건지 확실하지 않지만 상관없다.
책의 난이도나 텍스트 양에 전혀 쫄지 않고
뭐가 되었건 일단 술술 쓰고 퇴고도 잘한다.
그렇게 갑자기 해방되었다.ㅎ
앞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했는데 잘 되지 않을 때는
'파고들지 말자. 이지고잉 하자.' 슬쩍 빠져나와
사방에 쌓아놓은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을 보며
'내가 이렇게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엄지 척 한 번 하자.
이까짓 거 대충.
나는 베이스 기타 연주도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