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대접 : 12월, 가족 그리고 함께 식사
‘엄마께 식사 대접’을 시작할 때부터 12월 대접은 연말에 맞춘 페스티브(festive, '크리스마스 때의'라는 표현이다) 요리를 염두에 두었다. 이 또한 순수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결정했다.
오후 1시. 동네 카페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페스티브 요리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뒤적했다. 검색창에 크리스마스 파티 혹은 연말 파티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나오는 각종 레시피를 구경했다. 오븐에 구운 로스트 치킨, 채끝 한우 스테이크, 구운 야채, 메쉬드 포테이토, 훈제 연어 샐러드,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징글뱅글 주스, 상그리아, 갈릭 허브 버터 감자 등 연말 식사에 어울리는 화려한 요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찾아본 레시피 중에는 서양식 요리 외에도 연말 식사에 어울리는 한식도 있었다. 한우구이, 강된장과 같이 먹는 배추 말이, 감자전, 솥 밥 같은 것들이었다.
스크롤을 내려도 끝없이 나오는 연말 요리를 마주하다 보니 결국 우리 가족만의 페스티브 요리는 무엇이 있었는지 휴대폰 사진첩을 꺼내 보기로 했다. 분명 사진첩 어딘가에 가족과 연말을 축하하며 먹은 음식들이 있을 텐데…. 하지만 휴대폰 대신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집어들어 쭉 빨아 마셨다. 대접하는 삶을 살아도 당장 밥값(오늘은 커피값)을 벌려면 프리랜서 디자인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10시 반. 결국 밤이 돼서야 사진을 찾아보았다. 분명 매년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연말 식사를 했던 것 같은데 사진은 2021년과 2016년 기록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머나먼 곳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가족과 연말을 보내지 않았었구나. 어렴풋함은 내 기억마저 착각하게 만든다.
달랑 몇 장의 사진과 흐릿한 기억으로 추적한 우리 가족의 연말 식사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고기를 굽는다. 보통 투뿔 한우구이나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벤트로 여겨지는 연말 식사에는 고기와 어울리는 레드 와인이 빠지지 않았다. 가족 누구도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없어서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마트 진열대에 이쁘게 올려진 가성비 좋은 와인을 골라 마셨다. 그리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성인 4명이었던 우리 가족은 와인 한 병을 식사 내내 나누어 마셨다. 당연히 그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먹는다. 왜 굳이 케이크를 먹냐고 하면 그 이유를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지만, 무엇이든 (그 무엇을 모를 때에도) 축하하려면 케이크가 필요하니까.
어렴풋한 기억을 들춰보니 나는 가족과 함께 연말 식사를 즐겨왔다. 스시 오마카세나 파인 다이닝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즐거운 분위기를 내며 맛있는 음식을 해 먹는 게 우리 집의 소소한 전통이라고 느껴졌다. 올해는 조금의 변화가 있는 메뉴로 대접 겸 연말 식사를 꾸리면 가족 모두가 좋아할 것 같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 많은 양의 요리를 하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첫 대접에서 배운 교훈에 맞춰 상다리는 부러뜨리지 않기로 했다.
오늘 스쳐 지나간 수많은 요리 중 고민 끝에 결정한 메뉴는, 첫 번째로 입맛을 돋우어 줄 제철 과일샐러드다. 과일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한 메뉴다. 12월에는 귤이 제철이니, 귤을 활용해 올리브오일, 양파, 후추, 화이트 발사믹으로 맛을 낸 샐러드를 기획했다. 외국의 한 요리 유튜버에게 영감을 받고 내 아이디어를 더해 요리할 계획이다.
두 번째는 메인 디쉬가 될 요리는 구운 채소를 곁들인 스테이크이다. 스테이크는 콜드 시어링이란 방식으로 가정집에서도 스테이크를 그럴싸하게 구울 수 있는 법을 발견했다. 식당 주방 수준의 아주 센 불과 고급 스테인리스 팬 없이도 맛있게 스테이크를 굽는 기법이다. 여태 집에서는 스테이크를 식당에서 사 먹는 것처럼 맛있게 요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정식 요리 테크닉을 찾아다니다 만난 게 콜드 시어링 방식이었다. 그리고 가니쉬로 삶은 감자, 당근, 미니 양배추, 파프리카를 오븐에 구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구운 채소를 하려 한다. 덧대어 나만의 비법인 스테이크와 먹을 소스로 루꼴라 페스토를 사용하기로 했다. 루꼴라 페스토는 지난여름 혼자 만들어 먹었는데 맛이 근사해 엄마께 소개해 드리고 싶었던 요리이다.
세 번째는 멀드 와인(mulled wine)이라고 알려진 따뜻한 와인을 디저트로 만들 예정이다. 레드와인에 시나몬 스틱과 과일, 꿀을 넣어 뭉근하게 끓여 따뜻하게 마시는 페스티브에 어울리는 와인이다. 영국 유학 때 겨울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자주 먹었던 음료다. 멀드 와인은 식사 후 케이크와 과일을 먹으며 한잔할 수 있게 준비할 예정이다.
메뉴를 정하고 보니 연말에 엄마께 식사를 대접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대접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 시작했지만, 과연 이 대접의 과정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오늘 밤, 곰곰이 생각해 보다 잠에 들어야겠다. 어쩌면 꿈에서 그 해답이 나올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