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 : 매년 김장 하시는 엄마께
‘엄마께 식사 대접’ 프로젝트의 첫 대접이 우여곡절 끝에 지나갔다. 첫 식사 대접을 해드린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열심히 준비한 것에 비해 결과가 너무 초라해 속상한 마음이 들어 열흘 동안 자료를 정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시 이렇게 글을 타이핑하는 것은 그래도 나는 대접하겠노라 하는 다짐이다.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니겠는가.
요즘 내 일상의 키워드는 삶의 ‘정의’를 찾아가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의하면 될 것을 왜 마음에 쏙 드는 정의를 찾아다니는지…. 나도 참 유난이다. 죽음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탄생 이후의 여정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관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답을 찾기 위해 잘 다니던 꼰꼰 건축을 퇴사했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퇴사 사유서>를 만들어 독립출판 작가가 되었다. 그래도 답이 없어 한 달 전부터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도 살고 있다. 남들처럼 이직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호기롭게 창업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순한 듯싶다. 단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엄마께 대접해 드리고 있는 건 그렇게 살고 싶어서이다.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대접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과 상황에 사랑을 받기만 해왔기에 이제는 나도 사랑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삶을 한번은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과 함께.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했다. 겉은 뜨겁고 안은 차가운 오래된 냉장고는 마땅한 재료를 품고 있지 않았다. 장을 보기에 귀찮은 나머지 집 근처 써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을까, 아니면 집에 있는 라면을 끓여 먹을까 고민했다. 오늘은 요리하기 성가시니 라면이다. 싱크대 위 찬장을 열어보니 라면은 짜파게티뿐이었다.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반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편의점에서 빨간 봉투의 라면을 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쌀쌀한 온도, 바삭한 공기, 햇빛의 각도, 널찍한 공간감, 주변 인구 밀집도. 여기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낮 12시 11분, 이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자유로이 집 앞 편의점을 들르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벌써 출근을 멈춘 지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자유로운 생활은 아직도 어색하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냐고 스스로 물었다. 아직 그 답은 우물쭈물 이다. 창작가로 살고 있고, 프리랜서로 살고 있고, 대접하며 살고 있지만 이런 삶이 사실 아직은 어색하다. 짐작건대 시간이 더 흐르고 몸에 배어야 괜찮아질 것 같다. 대접하는 삶도 대접하고 대접하다 보면 어색함이 없어지겠지. 아니면 어색한 것이 무뎌져서 어색한지 모른 체 어색하거나.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 삶이 뿅 하고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현재의 우물쭈물은 삶의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 한번 해본 대접하는 삶도 어색한 게 당연한 것 아닐까. 내년 봄에는 나도 대접하는 삶이 자연스러워질까? 내가 살고 싶은 삶에 익숙해져 어색함이 없어질까? 아무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지. 오늘도 나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어색하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