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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Sep 03. 2023

기억,공간,방문

눈을 감고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다 보면 결국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 도달하게 된다. 내 경우엔 6살 때였나, 한 펜션 같은 곳에 딸린 파란 바닥 수영장에서 물 미끄럼틀을 탄 기억이다. 내 옆에 누가 있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흐릿하지만 그 장소만큼은 꽤나 선명하다.


기억을 이미지로 떠올리는 일은 장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놀랍게도 해마(감각에 서사를 부여해 기억을 만드는 뇌의 부분)에는 하나의 장소마다 배정된 하나의 세포가 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장소 세포’라 불리는데, 특정 장소에 발을 들이거나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면 정확히 해당 세포에 신경 전기 신호가 흐른다. 이는 우리의 기억에 공간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각은 공간을 거쳐 서사가 부여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침실


몇 달 전 이사 온 지금 집에 물건을 새로 채워 넣어가면서 했던 생각이다. 나는 집이 좋은 기억을 만드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아주 널찍하거나 멋들어지기 까진 못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감각이 느껴지면 했다. 여전히 몇몇 가구는 새로 바꾸고 싶고 들이고 싶은 소품도 많지만, 몇 번의 수정을 거친 지금 집에 꽤나 만족하며 살고 있다.


책과 술

이곳에 유달리 많은 건 책과 술이다. 도합 수백 개의 책과 술이 전반적인 공간의 성격을 만들었다. 거기에 그간 미술관을 다니며 영감이 돼준 전시의 공기와 알고리즘이 설계한 광고 폭격에 당해버린 반자의적 소비의 물질이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간간히 ‘이게 여기 왜 있지’ 싶은 소품도 세계 문학 진열장에 튀어나온 과학 도서처럼 어색하게 끼어있는데, 보통은 여행 중에 어쩌다 훅 꽂혀서 앞뒤 없이 들여온 귀여운 녀석들이다.


대표적인 귀여운 녀석들!

그렇게 세련됨과 고졸함을 어설프게 품고 있는 나의 집에서 나는 라왕 합판으로 짠 책장을 가장 좋아한다 - 가로세로로 잘 엮여 ‘짜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책장이다. 거실로 나와 의자에 털썩 앉으면 맞은편에 비효율적으로 꽉 채워진 책장이 선연하다. 가지런한 가늚을 보는 게 즐거워 자주 앉게 되고, 덕분에 한 줄이라도 글을 더 쓰고 한 장이라도 책을 더 읽는다.


또 친구들은 집에 오면 책장을 이뻐하다 말고 괜히 책 제목들을 쓱 훑어보고 있다. 조용히 하나 빼 집어 들어 가만히 누워 읽기도 한다. 활자를 좋아하는 손님에게 그냥 가져가라할 요량으로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을 여러 권 비치해 뒀는데, 하나둘 선물로 쥐여보내다보니 어느새 한 권만 남았다.



집에 온 사람에겐 짧게라도 방명록을 쓰게 한다. 사라진 <인연>만큼 인연이 쌓인 것만 같고, 시간 흐르면 다수의 저자가 몇 줄씩 보태어 쓴 책이 되어 내 사랑하는 책장에 꽂힐 것이다. 위스키든 책이든 내 아끼는 사람들이 즐겨주는 건 내 마음이 담긴 공간이 주는 가장 즐거운 기억이다.


내 공간에서 손님이 되어 본 사람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으면 한다. 과연 바람을 잘 흉내 내었구나 - 행간에 어여삐 나를 떠올려준다면, 나는 참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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