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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장 Sep 18. 2023

사랑, 바게트, 파리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은 스치듯 보아도 마음에 연꽃을 피워서, 나는 종종 팔꿈치 스칠 만큼만 가까이 붙어 걷는 연인을 보게 되면 미소를 짓곤 한다.


작년 파리에선 이런 장면이 있었다.

나는 보쥬 광장 뒤편을 한참 걷다 피카소 미술관 옆에 있는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쉬고 있었다. 검정 눈동자로 알록달록한 사람 구경- 낯선 여행지의 참맛이라 생각한다-이나 실컷 하던 중에, 공원 입구 철제문으로 한 한국인 커플이 들어왔다.

(일본인이었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한일 양국 중 하나인 건 확실하다)


앞에 선 양갈래 머리 여인은 원피스를 입은 채 팔을 아래 사선으로 휘적거리며, 파리를 온통 들이키려는 듯 했다. 들숨에 맞춰 다리를 들고, 날숨에 발을 살포시 내리고. 그 뒤로 청년은 진하고 넓은 청바지를 입고 하늘을 주로 보는 제 연인과 달리 주변 땅과 식물을 두리번거렸다. 이십 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저 즈음에도 나도 파리에 잠깐 머물렀었다. 지금은 유부남이 된 시커먼 남자와 함께였지만.


그러다 문득 청년이 앞서가던 여인을 잠시 잊은 듯, 뒤에서 혼자 멈춰 쪼그려 앉는게 아닌가. 그의 눈은 그 밑, 꽃가루를 헤집는 나비를 뚫어져라 향해 있었다. 오 초 정도 지났을까, 파리를 맡느라 정신팔려 한참을 혼자 앞으로 걷던 여인은 그제서야 사라진 인기척을 눈치챈 모양이다. 뒤를 돌아 멀리 쪼그리고 앉아 있는 제 연인을 발견하곤 그에게로 달려갔다.


사실 “아, 빨리 안 오고 뭐 해” - 라는 말이 나오거나 남자의 팔을 붙잡고 끌고 오는 행동을 예상했다. 아무튼 재촉이 내가 생각한 다음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인은 졸졸 달려와 옆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더니, 청년과 함께 꽃과 나비를 바라봤다. 나비는 이 거대한 한 쌍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걸 아는 듯, 천천히 암술과 수술을 헤집어 걸으며 네 개의 무릎이 모인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그 연극의 막이 오름과 내림을 본 나는, 그저 양 입꼬리만 올리고 앉아있었다. 왜 이리 늦게 오냐는 핀잔이 아닌 대사가 고마웠고, 연극 배경으로 뜀박질하며 노니는 주변 프랑스 아이들의 분주함이 좋았다.


이제 막 사랑을 빗는 연인은 어떠한 마음이고 또 어떠한 형태여야 하는지, 제대로 된 수사적 표현을 할 재간이 없다. 차라리 내가 본 것을 그나마 깔끔한 언어로 묘사하고, '사랑은 저러하구나' 하고 마는 게 최선인 것 같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사랑에 빠져 있거나 혹은 사랑에 빠지고 싶은 사람에게도, 나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정현주)라는 책을 종종 건네곤 한다. 한국의 전설적인 추상화가인 김환기 선생님과, 그분의 동반자이자 미술 평론가로 활동하셨던 김향안 여사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내게 책 정말 좋았다고 하는 지인들의 말을 듣는 게 요즘 큰 즐거움이다.



얼마 전에 이 책을 빌려주었던 친구에게 다시 돌려받으며, 책이 너무 좋아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중간에 뭉클함이 도져 눈물이 날 뻔 하기도, 두 분의 말과 행동과 그림이 귀여워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는 그의 감상평에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그랬으니까.


집에 돌아와 그가 꽂아놓은 인덱스를 훑어보며, 파리에서 연인이 생각났다. 김환기와 김향안 여사, 나비 청년과 꽃 소녀. 책을 펼쳐보니 분홍빛 석양으로 둘러싸인 구름 사진엽서가 끼어져 있다.


'몽글몽글 풍성풍성 행복하기를, 책 빌려줘서 고마워'


내 기분이 그의 바람처럼 된 날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꾸준히 책을 빌려줘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오늘의 노래,

Stella Jang - L'amour, les baguettes,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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