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필름 카메라 사업을 하는 형을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이 형과 얘기를 할 때는 주로 사업과 자산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곤 합니다. (제 글들을 쭉 읽다 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대화 주제가 사람에 따라 종횡무진한 편입니다.) 가끔씩 보이는 일상의 모습은 어설플 때도 있는 형이지만, 사업과 자산에 관해서는 번뜩이는 통찰을 보일 때도 많고 현실적인 문제를 헤쳐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해박한 편입니다. 나름 성공한 사업을 몇 개 꾸려본 형으로서 저는 그의 말을 주로 신뢰하며 듣는 입장인데요, 햇수로 세어보니 필름 카메라 사업도 벌써 3년 넘게 잘 되고 있네요. 심지어 부업입니다.
그 형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야 00아, 근데 내가 필름 카메라로 제일 돈 많이 벌었을 방법이 뭔지 알아?"
"뭔데요 형?"
"그냥 사업을 하지 말고 팔지를 말았어야 했어.”
"??? 왜요?"
사업가가 사업을 안 하면 돈을 번다니, 생뚱맞은 이 형님의 생각 흐름은 이렇습니다. 필름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모두 빈티지입니다. 현재 생산 라인은 사라진 지 오래고, 대부분의 기업은 불확실한 미래 구매 수요를 위한 설비 투자를 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더 이상의 추가 생산은 없고 망가지거나 소실되는 것만 있으니, 소비 지상주의 사회의 기성 전자제품으로선 매우 특이하게도 수요와 관계없이 공급이 꾸준히 줄어드는 상품인 것입니다.
그가 2년 전쯤 30만 원에 팔았던 라이카의 한 모델을 최근에 90만 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두배가 훨씬 넘게 가격이 뛴 거죠. 빈티지이기 때문에 개체마다 차이가 커서 정가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네이버나 알리바바에 검색하면 최저가를 찾을 수 있는 다른 인터넷 스토어들과 달리 가격 책정할 때도 매우 자유롭죠. 우리 다들 가게에서 물건을 보고 인터넷에서 최저가를 검색해본 경험, 한 번쯤은 있잖아요? 세상에 똑같은 필름 카메라는 없습니다. 기성품이지만, 동일품은 아닌 거죠. 정해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은 물건인 겁니다. 가치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립니다.
“아, 이건 소비재가 아니라 자산이구나!” 그는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속도로 돈을 찍어내는 신자유주의 시대 - 바로 ‘요즘’ , 돈의 가치는 꾸준히 하락하지만 사람과 물건(소비재)의 가격은 그대로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겠습니다. 똑같은 양의 돈을 받지만 그 돈의 질은 매 년, 아니 매 초 - 매 순간 하락하고 있죠.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 주식과 부동산을 비롯해 자산 가치의 폭등으로 세상이 호들갑이었습니다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자산이 폭등한 것이 아니라, 돈의 가치가 폭락한 겁니다. 흔해지는 것은 가치가 떨어집니다. 흔해지지 못하는 것의 가치는 보존되거나 상승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계를 비롯한 명품 기업들은 스스로 생산량을 제한하고 상품에 달린 택 가격을 매년 상승시키는 방식으로 이름값을 지켜왔습니다.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운명이었던 자신들의 소비재를 인플레이션이 반영되는 자산으로 만드는 거죠. 원자재, 인건비 상승은 그토록 가파른 명품 출고가 상승세의 핑계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태생적으로 흔해질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로고를 자산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기업의 몸부림인 것입니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기 위한 필수품인 필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Kodak> 한 군데에서만 생산하고 있어 근래에 갑작스레 높아진 수요를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있고, 딱히 수요에 생산을 맞출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화폐 가치 폭락과 맞물려서 작년 롤 당 육, 칠천 원쯤 하던 것이 만 원, 만 오천 원 날이 갈수록 가격이 오르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필름도 사실상 자산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그때쯤 풀매수를 했으면 돈을 좀 만질 수 있었을까요?
근래의 폭증한 위스키 수요를 보며 저도 한편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위스키는 일종의 공산품이긴 하지만 여타 물건들과 달리 '숙성’의 과정을 거칩니다. 엔트리급의 스카치위스키만 해도 기본적으로 12년의 숙성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당장 공장을 하루 만에 지어 생산을 시작한다고 해도 적어도 12년 뒤에나 그 제품 출고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위스키 또한 탄력적인 변화가 불가능한, 수요와 공급 교차점의 원리가 들어맞지 않는 물건입니다. 맥캘란의 경우 작년에 증류기를 추가 설치하고 설비 확충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숙성을 마쳐 병입한 제품이 출고되려면 10년도 훨씬 더 걸릴 겁니다.
게다가 특정 연도 빈티지의 위스키 양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알코올 증발량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양은 줄어들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흔해지지 않는 것, 일종의 자산인 것이죠. 특히나 맥캘란을 비롯한 여타 증류소의 초고숙성 셰리 위스키의 경우 셰리 시즈닝 오크통 이슈와 더불어 현재보다 빈약한 과거 증류 원액량으로 인해 가치는 아마 갈수록 가파르게 상승할 겁니다. 주류세를 비롯해 규정이 까다로운 법적 절차로 제대로 판매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바람만 같아서는 1980년대 이전 연도 빈티지의 맥캘란 쉐리 캐스크 숙성 캐스크를 통째로 사서 보유해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글로 옮기다 보니 좀 생뚱맞은 전개 같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 형님은 은행에 돈을 넣는 것은 매일 돈을 분쇄기에 갈아 넣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비트코인을 보유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시간에 따라 하락하는 달러화 기준의 화폐 가치를 헷지할 수 있는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 형님의 생각으로는 가장 적절하며 대체 불가능한 수단이 비트코인이라는 것이죠. ‘왜 갑자기 비트코인이냐?’에 대한 설명은 굳이 적진 않겠습니다. 비트코인의 특성과 화폐 제도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필름 카메라부터 시작한 위 논리 과정에서 비트코인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임을 아실 것이고, 코인과 NFT를 비롯한 가상 자산을 못되게 바라보시는 분께는 며칠을 설명해도 이해를 도와드릴 자신이 없거든요.
한 병에 몇 억이 넘어가는 위스키가 경매에 나오는 것을 보며 저는 ‘이 세상은 유용성-실효성이 가치와 관계없는 사회구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맛이 좋다고 한들 30ml 한 잔에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맛이란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요. 소유욕을 충족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들, 이건 욕구 충족의 의미를 아득히 넘어선 가격입니다. 실물로서 소비할 용도의 가치가 아니라 그냥 자산으로서, 흔하지 않은 것이니까 이런 값이 매겨진 것이겠지요. 가상 자산도 이러한 맥락으로 따라가시면 이해하시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1966년 맥캘란 빈티지와 NFT 모나리자, 모두 그만한 실용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인구가 늘고 생활 여건은 상승하면서 노동 가능한 사람의 값은 갈수록 떨어질 겁니다. 기계와 인공지능의 발달이 어디까지 노동력을 대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루어지겠지만, 기술의 발전과 별개로 화폐로 가늠되는 인간의 값어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털어버리면 아무리 길어야 피니쉬가 한 시간도 채 안 될 위스키보다야 몇 시간이고 눈을 맞추고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을 달래는데 훨씬 유용할 텐데요, 이미 세상은 값어치를 매기는 기준이 너무 달라져버렸습니다. 글을 적다 보니 좀 서글프네요.
필름 카메라와 맥캘란, 전혀 다른 물건이지만 나름 비슷한 논리 과정을 거쳐 같은 통찰을 하나 이끌어 냈습니다. 또 같은 통찰이었지만 그것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내린 결론을 바라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미쳐버린 달러 기반 통화 시스템과 시간을 헷지할 수 있는 수단, 비트코인을 사야 한다!’
‘유용성이 평가받지 못하는 사회, 인간의 가치가 갈수록 떨어지는 시스템이 옳은 사회인가?
저는 이래서 자기만의 통찰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즐겁습니다. 정말 모두가 각자의 생각이 있어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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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관찰이상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