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3부작 [1부]
43%, 750ml, 프롬 아일라, 라프로익 10yrs
[라프로익에는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다.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경박한 알랑거림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꾸밈없는 설명만으로도 멋진 찬사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쓴 글은 아니다. 하루키 씨는 역시 수필에서의 모습이 난 더 좋다. 소설에서는 경박하고도 알랑거리는 섬세한 묘사를 못해 안달인 사람이 에세이에만 들어서면 이렇게 담백하고 유머러스하다.
감기가 독하게 들어 며칠 째 집에만 있다. 책상 옆에는 주제도 모르고 쌓아올린 위스키 장식장이 본래의 기능을 잃은 설치미술처럼 서있다. 소독약을 닮은 초록병의 라프로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처음 접한 피트 위스키가 라프로익 10년 40도 짜리였는데, 2주 전쯤 43도로 나온 버전을 발견하곤 냉큼 집어왔다. 아마 북미 버전일 것이다. 아직 뚜껑도 따지 않아 맛도 본 적 없지만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
몇 줄만 부어도 카데바 냄새가 서재에 확 퍼지는 저 녀석, 피트 향을 맡고 있다보면 어쩌면 정말 치유 효능이 있을지도 모를 것만 같은 착각도 든다. Love or Hate, 아일라 지역의 피트 위스키는 호불호가 정말 강하다고 알려져있다. 양호실 냄새, 소독약, 정로환, 치과(!) 냄새 라는 평이 지배적인 첫 인상은 분명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법하다. 나는 정말 극호, 대체가 불가능한, 너무나도 매력적인 술이지만.
싱글 몰트에서도 쉐리 위스키를 대표하는 향은 달콤함, 과일 향이다. 건포도, 아카시아 꿀, 시트러스, 초콜릿, 스위트 와인 - 무심결에 들어도 달달할 것만 같은 향들이 노징 노트에 스친다. 한 모금 맡고서 들이키면, ‘아, 역시 맛있네’ 가 떠오르는 위스키. 즐거울 때 향을 맡고서 옆 사람과 잔을 부딪히면 그 쾌락이 증폭될 것만 같은 맛.
반면 피트 위스키의 그것은 즐겁게 마시고 있을 때 생각나는 향이 아니다. 혼자 있는 어느 날 문득 찾아 가고픈 향이다. 익숙한 듯 처음 맡는 바다 내음, 이끼 덮인 쓰러진 고목을 들어낼 때의 쿰쿰함, 비오는 날 바닷물에 젖은 장작을 그슬릴 때 연기가 섞인 향. 비오는 날 길가에서 조용히 젖어가는 종이 박스처럼 생각에 침전할 때 마실 법한 위스키이며, 슬플 때 나를 씁쓸하게 달래주는 향이다. 처음 접할 땐 느끼기 힘들긴 하지만, 쭈욱 들이키고나면 묘하고도 깊이 있는 달큰함마저 말미에 올라온다.
지금 내게 가격을 불문하고 어떤 위스키든지 딱 한 모금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아마 맥캘란에서 나온 빈티지 올드 바틀을 달라고 할 것이다. 혹시라도 있다면 빌리워커의 고숙성 글렌알라키 CS도 좋겠다. 그러나, 만약 마지막으로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위스키를 고르라고 한다면, 혹은 딱 하나의 위스키만 정해서 인생에서 그것만 마실 수 있게 한다면 주저없이 피트 위스키를 고르겠다. 라가불린 16년, 돈이 조금 더 있다면 라프로익 25년.
하룻밤 최고의 섹스를 위해 어떤 여자든 고를 수 있다고 한다면 뭇 남성들은 화려하고 육감적인, 빅토리아 시크릿 무대에 설 법한 관능적인 여성을 고를 것이다. 입술은 달달하고, 장식은 화려하고, 몸은 탄탄하고 피부는 부드러워 생각없이 맡아도 직관적인 즐거움을 가진, 쉐리 위스키 같은 그런 사람. 그러나 전쟁터에서 가슴 속에 품고 다닐 사진은 아마 아내의 사진이요,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보고 싶은 여자는 아마 긴 시간 함께해 눈을 감아도 얼굴이 그려지는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비키니 모델 하나 옆에 없어도 살아지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살기 힘들다.
애환, 애증, 순정!
- 피트란 그런 향이다.
꽃기운이 찬바람을 더 몰아내기 전에 시장에서 석화를 사와 저 녀석과 함께 마시고 싶다. 마늘 파프리카 레몬 살짝 썰어올리고, 얼마 전 담근 올리브 마리네이드를 곁들여서. 지금보다 코도 뚫리고 목소리도 더 청아한 상태면 좋겠다. 가능하면 내 사랑하는, 좋아하는 사람과도 함께.
p.s.
이 글은 막바지에 접어든 지독한 감기와 함께, 위스키 대신 말린 로즈마리 차와 함께, My foolish heart를 연주해주는 올빽머리 에반스 형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