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장 Apr 01. 2023

검정 뿔테를 쓴 감성남

검정 뿔떼를 쓰면 어쩐지 ‘그저 그런 감성쟁이’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안 쓰게 된 지 좀 되었다. 유튜브에선 ‘감성 집단’을 규정할만한 이런저런 특징들을 모아 희화하하는 게시물이 올라온다.


인간 무형 문화재 수준의 복제력(출처.감성욱)


머리는 아이비리그컷 혹은 가르마펌을, 발마칸 코트에 통 넓은 바지와 뉴발란스 99X 운동화, 이솝(Aesop) 혹은 르라보를 뿌리곤 감성 카페에서 맥북을 편 남자들(-대체로 아이비리그컷 정수리엔 에어팟 맥스를 얹는다). 3-4년 전엔 성수나 한남에나 가야 있던 풍경이 이제 지방 소도시 먹자골목에만 가도 여럿 눈에 밟힌다.






덕분에 나는 애정해 온 검정 뿔테를 집어들 때 머뭇거림이 생겨버렸다. 왠지 다른 이들이 나를 '저 부류'로 단정지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3년 전쯤, “이 정도 클래식한 상품(上)이라면 10년은 쓸 수 있다” 자위하며 나름 큰 마음먹고 샀던 아이템인데, 그 반도 못 채우고 트렌드의 소용돌이에 역류되어 기피하고 있다니.


그렇게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안경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것만이 방점을 찍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엔 선택의 여지없이 그 녀석을 쓴다. 아주 가끔, 온몸을 검정으로 감싼 날, 날것의 상남자(!) 같으면서도 포멀해보이는 인상이고 싶은 날 말이다. 내가 굳이 검정 뿔테를 낀 날은 그래서 아마, 캐주얼하기보단 나름 진중하면서 리더십 있는 이미지로 포장하고 싶은 날일 테다. 어쩌면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날일지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디테일 이겠지만 나는 요즘 그래서 검정 대신 갈색 뿔떼를 데일리로 활용한다. 한때는 아이비컷 비슷하게 했고 지금은 또 가르마펌을 했지만, 나름의 차별점을 둔답시고 뒷머리를 스리슬쩍 기른다 - 호불호는 있는 편이다 (‘장발-짱’ 편 참고). 회색 뉴발란스 대신, ‘스펙테이터’에서 나온 트레이너를 신는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샀는데 착용감이 아주 편해 매물만 있으면 하나 더 들여오고 싶다. 모두 다 ‘감성남’ 집단 안으로 규정지어지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스펙테이터의 서비스 트레이너 (출처. 엄브로)


 한국의 발마칸은 어쩐지 과하게 귀여운 느낌을 내는 것 같아 몇 년째 견물생심만 들고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보름 전에 렉토(RECTO)에서 눌러놓은 카키 색감의 발마칸을 보았는데, 편한 실루엣에도 포멀한 느낌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입춘도 훤히 지난 3월 아닌가, ‘오늘까지가 마지막 할인’이라는 직원의 말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내려놓았다.





안경은 사람의 인상을 아주 많이 결정짓는다. 누가 그랬던가, ‘가장 편하고 저렴한 성형’이라고. 이미지와 외모를 한 단계 올려주기도, 낮추기도 한다. 적어도 바꿨을 때 지인들이 가장 잘 알아차리는 장신구가 안경인 건 대부분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니 패디큐어 색 바꿔놓고 연인에게 “나 뭐 바뀐 거 없어?” 묻지 말고, 안경을 스윽 바꿔서 물어보도록 하자. 그것마저 못 알아챈다면, 정말 헤어져도 무죄가 맞다.


안경이 다 그게 그것 같아 보일지라도 옷 좀 입는 친구가 있다면 함께 룩옵티컬 아닌 안경 편집샵을 가보는 건 어떨까. 5만 원짜리 안경테를 사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40만 원 모스콧을 살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10~20만 원 정도, 약간 과하다 싶은 정도의 가격대를 시도해 보자. 안경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얼마 전 나는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가벼운 금속테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실버 티타늄 색상을 하나 들였다. 얼굴을 반 덮을 크기의 동-그란 테는 아니다. 그런 건 미소년이나 여자들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포물선의 하단부 쉐입이 올라가다 상단부에서 칼로 무를 벤 듯 뚝 잘린 외형이 귀여움을 냉철하게 끊어주는 크라운판토 쉐입이다. 책을 읽거나 환자를 대할 때 쓰기에 참 좋은 것 같다.


YellowsPlus, DARCY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집을 나서며 어떤 안경을 쓸지, 어떤 색의 양말을 신을지 잠깐 고민하는 과정은 내게 있어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움이다. 그러나 또 언제까지 여기에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브랜드의 CD(크레이티브 디렉터)나 패션 매거진 포토그래퍼쯤 되면 그래도 좋겠지만, 내 직업은 패션 산업과 하등 관련이 없다. 언젠간 스티브 잡스가 되어보는 상상을 한다. 시그니처 착장이 정해지고, 이미지를 형성하고 말 것도 없이 물아일체가 된 경지. 아낀 에너지와 시간은 온전히 본업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옷 잘 입는 사람’의 착장을 찾아보고 친구가 조언해 준 옷을 입으며 ‘감성남’의 그룹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실컷 따라잡으려 애쓰다 이제 또 그게 싫어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 내 태도가 타인을 덜 의식하게 된 건지 더 의식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초보는 그룹에 속하고자 하고, 중수는 그룹에서 벗어나 개별성을 인정받고자 하며, 이를 넘어선 초인일 때는 하여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외출할 때 안경 하나 고르는 데도 이런 칼럼을 떠올리는 나는, 초인은 아직 한참 멀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스프레소-부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