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메뉴와 바 추천
가끔 작은 카페에 들어가 스탠딩 테이블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얼마 안 하는 노력으로 얻는 기분 좋은 감각이지만, 자주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카페를 갈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회사 점심시간, 다 같이 밥을 먹곤 여럿이서 우르르 몰려간 카페에서 머릿수대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주문을 '잠깐만-!'하고 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다 대고 “나는 아아 말고 <에스프레소 콘파냐>”라는 기상천외한 요청까지 덧붙일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삼겹살 회식에서 혈혈단신 소등심을 주문하는 신입 사원만큼이나 눈총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 카페 갈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느끼는 높은 행복 효용에 비해 나도 그리 자주 마시진 않는 것 같다. 골목길을 걷다 괜찮은 에스프레소 바를 발견하거나, 어느 낯선 동네에 놀러 간 김에 근처를 검색해보다 유명한 바를 찾았을 때 들어가 한두 잔 주문하는 정도이다.
그러니 혹여나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주류 문화 추종자임을 티 내며 나 홀로 에스프레소를 시킨다면,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그대가 편하고 좋단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런 ‘내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은 에스프레소를 권한 적이 몇 번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나만큼 즐거워하진 않았다. 확실히 기호식품엔 호불호가 있는 모양이다.
에스프레소는 진하고 고소한 향이 일품이지만 그만큼 카페인의 쓴 맛도 진하다. 굳이 원액을 고집할 필요 없이 쓴 게 입에 안 맞는다 싶으면 설탕을 살짝 넣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평양냉면에 식초를 뿌리는 걸 금기시하듯 에스프레소에도 순수령을 강조하며 설탕을 넣는 걸 사문난적으로 여기는 강경파들도 있다. 그러나 본고장 유럽에서도 커피를 시키면 설탕 스틱이나 비정제 각설탕을 함께 내준다. 단 건 삼키고 쓴 건 뱉고 싶은 건 이태리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씁쓸함 빠진 고소한 향과 침전된 설탕의 달콤함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또 고품질의 원두를 알맞게 로스팅하여 추출한 ‘잘 내린 에스프레소’라면 설탕이 복합적인 향과 맛을 즐기는 데 방해된다는 의견도 있다. 다시 말해 고급일수록 순수하게 즐겨야 한다는 말인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으면 각자 취향껏 즐기는 게 제일이지 싶다. 입문자라면 일단 설탕이 들어간 걸로 먼저 시도해보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에스프레소 바를 별로 가본 적이 없다면 원액을 섣불리 도전하기보다는 에스프레소에 크림이나 우유를 더한 음료를 추천하고 싶다. 나는 가장 부담 없으면서 어느 카페를 가나 나쁘지 않은 퀄리티를 보장하는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를 자주 마신다. 한국에선 ‘마끼아또’하면 캐러멜 마끼아또의 이미지가 강해 달고 양 많은 음료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마끼아또는 원래 에스프레소에 위에 우유를 살짝 올린 음료를 지칭하는 말이다.
‘마끼아또(Macchiato)’라는 말 자체가 ‘점을 찍어 표시하다(Mark)’라는 뜻이다. 추출한 갈색 에스프레소 원액 위에 흰 우유를 점묘화를 그리듯 올린다. 차가운 우유를 올리면 마끼아또 뒤에 프레도(Fredo)를, 따뜻한 우유 거품을 올리면 칼도(Caldo)를 붙인다. 쓴 맛이 잘 중화되어 구수한 단맛을 자연스럽게 살려주기 때문에 아침에 속을 깨우며 빵과 함께 하기에 좋다.
힘든 걸음이나 업무로 당이 떨어져 폭신한 달콤함이 끌릴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콘 파냐(콘 판나)를 찾는다. 콘 파냐(Espresso Con Panna, 이탈리아에선 꼰빤-나(냐)로 발음한다)는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을 올린 음료로 차갑고 달콤한 크림과 따뜻하고 씁쓸한 커피의 진한 향미가 어우러지는 것이 일품이다. 균일한 맛을 좋아해 위에 얹힌 크림을 스푼으로 휘저어 들입다 섞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다.
나는 부드럽게 달콤한 거품을 입술로 헤쳐 림(Rim)을 물고 잔을 가볍게 기울인다. 차갑게 달라붙은 크림 사이로 진한 커피물이 향을 뿜으며 혀를 적시는 그 순간이 좋다. 그러려면 키스를 하기 직전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잔 입구를 조심스레 입술에 물려 크림의 감촉을 먼저 느껴야 한다. 그러곤 연인의 고개를 숙이듯 기울여 홀짝이면 심장을 뛰게 하는 액체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키스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에스프레소 콘 판나를 먼저 마셔보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바를 두 군데 소개한다.
대학 시절 한번씩 지나치던 서촌의 경복궁역 4번 출구, 그 뒤편엔 ‘쏘리 에스프레소바’가 있다. 포르투갈식 에스프레소 커피를 지향하는 곳으로, 포르투갈 국민 커피인 델타(Delta)의 잔과 원두를 사용하며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나는 이곳에 가면 시그니쳐 베스트인 에스프레소 오네로소를 좋아한다. 흰 우유 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발로나(코코아) 파우더를 뿌린 오네로소는, 라떼 마끼아또와 스트라파짜또(에스프레소 위에 소량의 설탕과 코코아 파우더를 뿌린 메뉴)의 장점을 한데 모아놓은 느낌이다. 초콜릿을 디핑하여 마무리한 끌레도르 아이스크림처럼 발로나 파우더의 초콜릿 향이 우유와 부드럽게 섞인 에스프레소를 옅게 감싼다. 날씨 좋은 날 경복궁역에서 내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잠깐 들려 마음을 달큰고소하게 적시기에 이만한 게 없다.
이곳은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로도 유명하다. 단품으로 구매할 수도 있고, 맥모닝 세트처럼 [에스프레소+에그타르트] 세트를 평일 오전 10시까지 3000원이라는 좋은 가격에 판매한다. 에그타르트를 먹을 땐 라떼 마끼아또가 좋다. 내가 만약 세브란스나 연세대학교 직원으로 이곳을 거쳐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면 매 아침마다 그렇게 먹었을 것이다.
쏘리 에스프레소 바는 그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정기 구독권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월 35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정기 구독권과 5만 원/10만 원 일정 금액을 할인된 가격에 미리 충전하여 쓰는 포인트 제도가 있는데, 지인들과 나눠 쓸 수 있는 방법도 있으니 관심 있다면 적극 활용해보길 추천한다.
외관만 보면 쨍한 코발트블루 인테리어에 영문으로 온통 뒤덮인 메뉴와 벽 포스터 등, 힙한 감성만 추구하는 인스타용 맛집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와 마시며 경험해보면 작지만 실속 있는 메뉴 구성과 훌륭한 맛, 단골을 위한 가격 정책까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요소를 두루 갖춘 가게란 걸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이곳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한다.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있는 운영 시간대라고 볼 수 있다. 단골을 배려하며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닮아있는 가게! 유럽을 다니면서도 그렇게 느꼈지만, 그것이 골목 카페의 본질이 아닐까.
강북 옛 거리에 위치한 가게를 소개했으니 한강 이남에 있는 가게도 하나 소개하겠다. 한강을 건너 잠실을 지나 송파역 근처 잠실여고의 골목길을 걸으면 ‘선호커피’ 라고 적힌 주황색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정통 이탈리아식 커피를 표방하는 곳이다. ‘쏘리 에스프레소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탈리아에 실제로 있을 법한 동네 터줏대감 카페의 느낌을 잘 살린 내외관을 가지고 있다. 가게 밖엔 나무 계단과 짚방석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낡은 카펫이 깔려 있다. 억지로 낸 힙한 감성 같은 건 없고, 주황빛 자연스러움 속에 왼편 나무 선반에 올려진 위스키 병과 오른편 나무 선반 위 커피 관련 굿즈가 들어오는 손님을 반긴다.
나는 이곳의 알 카포네와 그라니따를 좋아한다.
알 카포네는 이곳에서만 파는 시그니처 메뉴로, 에스프레소에 크림을 조금 섞고 코코아 파우더를 넣어 마무리한 메뉴다. 스트라파짜토보다 부드럽고 정돈된 달콤함을 지닌 메뉴로 에스프레소 초심자들에게 권하기 좋다. 술로 치면 탁 치는 알콜 향만 제거된 느낌으로, 거슬리는 쓴맛을 제거하고 커피와 초콜릿의 향과 맛이 부드럽게 어우러진 메뉴다. 개성을 버리진 않되 호불호 없을 녹진한 달콤함을 선사한다.
멀리 송파역에서부터 걸어온 사람이라면 도착했을 때쯤 더위를 느끼며 시원한 음료를 찾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럴 땐 얼린 에스프레소 슬러시에 휘핑크림을 올린 그라니따를 주문해보자. 크림과 슬러시를 스푼으로 듬뿍 떠 입안에 넣으면 차가운 달콤함이 열을 식히며 녹아 춤을 춘다. 이곳의 커피 슬러쉬에서는 약간의 산미가 느껴지는데 그 상큼하고 청량한 질감이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내가 여기서 첫 잔으로 가장 자주 먹었던 메뉴이기도 하다.
선호 커피 가게에는 바깥 계단부터 시작해 내부 선반까지 다양한 위스키가 진열되어 있다. 커피를 마시며 사장님과 위스키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바쁘신 사장님께 굳이 말을 걸었던 건 대충 인테리어용으로 어디서 적당히 가져온 그런 위스키 병들이 아니라, 시그넷, 글렌알라키 12년, 와일드터키 레어브리드 등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마실 법한 라인업이었기 때문이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일 끝날 때나 중간중간 한잔씩 마신다며 눈에 보이는 술병들을 신명 나게 설명하셨다. 사장님의 일은 커피지만 취미는 위스키가 아니었을까.
그쪽에 취미가 있으신 덕인지 ‘카페 꼬레토(Caffè corretto)’라는 메뉴도 눈에 띈다. 에스프레소와 함께 리큐르(혼성주) 등 알코올을 마시는 메뉴이다. 들어가는 술은 삼부카(야니스 리큐르)나 그라파(와인을 만들고 난 포도를 증류해서 만든 술)가 일반적이지만 -사장님이었는지 누구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으나- 와일드터키같은 버번 위스키를 넣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어떤 술이 들어가냐에 따라 가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뉴판에도 2000원, 3000원 숫자로 적힌 다른 음료들과 달리 카페 꼬레토 옆엔 [ 가격 :-) ]으로 센스 있게 표시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따로 커피만 파는 에스프레소 바의 개념보다는 낮에는 커피를 팔고 밤에는 술도 주문하는 그냥 ‘바’의 개념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카페 꼬레토도 정말 이탈리아 현지스러운 메뉴라고. 사장님의 취미를 통해 더 현실감 있게 이탈리아 바 문화를 재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선호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지하철 송파역에 내려서 자전거를 탄다. 가게 앞에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카페인 걱정도 함께 바깥에 주차해둔 채 그라니따, 알 카포네, 콘 판나, 에스프레소, 아포가토 등을 2-3잔 연달아 마신다.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여기 콘 판나도 맛이 아주 좋다. 가게 내부가 에스프레소 바 치고도 협소한 편이라 작은 테이블 옆에 서서 다른 사람들과 등을 붙여 마시고, 입구 계단 옆에 간이로 마련한 외부 좌석에서도 이렇다 할 인테리어 없이 콘크리트 바닥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궁상마저 멋스러워 보이는 곳이다. 사장님은 주문을 받고 일하실 때도 근처 로컬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여유 있게 커피를 내린다. 흡족한 입맛을 다시며 가게를 나설 때 날씨마저 좋으면 자전거를 타고 석촌호수로 가 산책을 한다. 그런 오전을 보낸 날은 어지간해선 온종일 기분이 좋다.
동네 주민이든, 커피에 조예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이든 이곳은 단골이 참 많다. 하지만 평일 오후 3-4시면 문을 닫아버려 외지인의 발길에 야속한 가게이기도 하다. 음료를 파는 것보다 원두를 로스팅해 업체에 공급하거나 판매하는 것이 주 업무인지라 가게 문을 일찍 닫는다고 한다. 영업시간만 보면 동네 주민들만 애용할 것 같지만 나처럼 멀리서 시간을 내 찾아오는 분들도 종종 보였다.
이탈리아로 유학이나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실제 이탈리아인에게도 맛은 물론 인테리어, 메뉴 구성까지 ‘진짜 이탈리아 바 같다’는 인정을 받는 곳이지만 정작 두 명의 사장님은 이탈리아를 한 번도 가보시지 않았다고 한다. 사장님도 그렇고, 선호 커피라는 가게는 참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사장님은 친숙하지만 전문적이고, 느긋하지만 열정적이다. 가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홍대병’이라는 말이 있다. 비주류만 쫓아다니며 자기 세상만이 문화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이다. 보통 사람은 그러지 않겠지만 한국에선 아직 비주류인 에스프레소 문화에 반해 버리고 나면 기존 한국의 카페 음료 문화를 얕잡아 보는 인식이 생길 수도 있다.
‘저 밍밍한 것은 커피도 아니다’,
‘유럽의 커피 종주국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신다고 하면 기겁을 한다’
며 말이다.
이러한 문화 충돌 현장의 묘한 기싸움이 비단 어제오늘, 한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과거부터 영어권에는 ‘Snob’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상류층을 동경하며 잘난 체하는 속물을 일컫는 말이다.
문화는 상대적이라지만 기본에 대한 집착으로 더 나은 경험을 선사하려는 문화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원단과 패턴, 디자인에 초점을 맞춰 끊임없이 더 발전된 옷을 만드려고 고민하는 의류업체가 있는가 하면, 연예인과 바이럴 마케팅을 통해 인지도만 쌓아서 차별성 없는 티셔츠나 맨투맨 가슴팍에 로고만 박아서 팔아 대는 브랜드가 있다. 둘 중 전자가 인정받고 잘 팔리는 문화가 더 품격 있는 문화가 아닐까. 번외로 쓰는 글이지만 현재 한국은 후자로도 모자라서 라이선스를 사 와 옷에다 외국 방송사 로고를 붙여서 판다. 정가가 40만 원이 넘어가는 근본 없는 롱패딩이 온라인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으니 좋은 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생산자들이 허탈할 노릇이다.
가격에 맞춘 원두를 공장에서 균질한 강배전으로 대량 로스팅해 전국에 퍼트린 빅사이즈 아메리카노보다야, 위 글에서 쭉 설명한 에스프레소 문화가 더 발전되고 지향할 문화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나는 카페인을 수혈하는 것에 가까운 공장식 음료 문화이고, 또 하나는 음료의 향과 맛을 즐기는데 초점을 맞추고 지역의 커뮤니티로서 기능하는 바 문화이다. 어떤 것이 더 인간미 있고 닮고 싶으며 자랑스러운 문화인지는 길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전체를 폄하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패션에 TPO가 있듯, 음료에도 TPO가 있다. 밍밍하게 쿰쿰한 아메리카노가 거슬릴 때도 있지만 또 어느 날은 시원하고 부답스럽지 않게 넘어가는 목넘김이 끌릴 때도 있다.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철 관광지, 대형 카페에 열기를 식힐 겸 들어섰다면 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더위만큼 목은 마르고 다른 음료는 입이 텁텁해져 마시기 싫을 때, 통유리창 너머 남해 바다를 바라보며 씁쓸함 속 상큼함을 옅게 감춰둔 아아를 빨대로 빨아먹는 즐거움은 오직 아아만이 선사할 수 있다.
에스프레소가 위스키라면 아메리카노는 하이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깊고 진한 복합적인 풍미는 위스키가 단연 몇 수 위이겠지만, 저렴한 위스키에 탄산수를 넣고 시원한 얼음을 띄워 레몬으로 마무리한 하이볼이 제격일 때도 많지 않은가. 삿포로식 양고기를 차례로 구워주는 식당에서 시원한 산토리 하이볼을 마신 적 있다. 토닉워터가 아닌 기포 큰 탄산수로 만들어져 인공적인 단맛은 빠지고 청량해 기름진 고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가볍게 마시려던 첫 모금에 주욱 절반 넘게 들이켜고서는 “한잔 더 시키자”는 감탄을 뱉었다. 이런 역할은 분명 위스키가 아닌 하이볼이 해야 할 일이다.
출근하면서 습관처럼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여 뇌를 깨우는 직장인도 있고, 마땅히 함께 만날 장소가 없어 저렴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도 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를 떠나 상황에 적절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 든다. 바다를 편히 보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잠을 깨워 일을 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며, 사람을 만나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지금껏 우리는 상황이 택한 커피를 너무나도 많이 마셔왔다. 이미 습관이 되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살짝 평소 궤도에서 이탈해보는 건 어떨까. 이를테면 녹진한 향과 맛, 커피를 위한 커피를 마셔보는 일로 말이다. 눈을 감을 테면 감아보고, 달콤쌉싸름한 에스프레소를 느껴보자.
그 어느 것도 아닌 ‘나’를 위한 커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