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의 미학
누구보다 스마트폰을 많이 쓰면서 스마트폰은 인류의 정취를 잡아먹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깊은 산에서 수행한다는 고답한 수도승이 막상 도시에 와서는 콜택시를 불러서 쇼핑을 다니는 모순과 비슷할까. 인간은 편리한 걸 찾기 마련이고 너도 북어인데 뭘 자꾸 따지냐고들지는 말자. 일회용품이 편리하다고 속없이 써재끼는 걸 권장하는 게 선(善)은 아니지 않나?
전화기는 가능성을 향유하는 매개체이고, 스마트폰은 응당한 즉답을 요구하는 녀석이다. 받을까 말까- 설렘을 고조하는 통화 연결음 들으며 기다릴 줄 알던 마음들이, 카톡이 생기면서 ‘이 사람은 뭐하는데 아직도 답장이 없어?’로 - 기대가 불발되면 촉발하는 분노-로 변했다.
이상형을 물으면 연락 잘 되는 남자가 좋다는 여자들이 있다. 그래서 소개를 할 때 자기는 ‘원래’ 카톡 잘 안 한다며 미래에 소홀해질 자신을 미리 방어하는 남자도 있다. 기술이 발전되면 사랑하는 방식도 변화해야 하나 보다. 삼백 년 전에 이상형을 ‘연락 잘 되는 사람’이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게다.
- “봉화를 올리는 것이 뭣이 그리 중허냐?” 하고.
전화기가 유선이던 시절엔 그래도 확연하게 몸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이제는 몸에서 떨궈놓아도 정신이 스마트폰과 좀처럼 떨어지려 하질 않으니 제 새끼를 품는 캥거루처럼 주머니에 쏙 집어두어야 안심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불안 증세에도 나는 아무래도 세상과 조금 덜 연결되어 있는 것이(정확히 말하면, 시도 때도 없이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인스타 스토리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전을 뿌려 버리지 않나. 아무래도 과하다.
부모님 댁과 시간적 거리가 수 시간은 넘다 보니 차로 한 시간 내 거리에 살면 더 자주 찾아뵙고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러나 계속 함께 붙어사는 것을 떠올리면 또 못할 일이다. 나와서 산 지 십 년이 넘으니 엄연히 타인인 당신의 무해한 무언마저 가끔은 내 자유에 제동을 건다. 고향에 몇 번 내려가 보니 부모님 품에 껴들어 사는 건 삼에서 사일, 조금 무던한 사람이라면 오에서 육일 정도가 적당하다. 그것이 MZ세대의 극진한 효도 기한이다.
연락이란 것도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가끔씩, 필요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오고, 닿고, 갈 수 있는 것.
우리는 무선도 유선도 아니라 시선에 사니까.
카카오가 불이 나니 내가 글을 쓰는 브런치 플랫폼도 터졌다. 피드가 제때 올라오지 않고 업로드도 안 된다. 대체 뭘 했다고 슬럼프가 왔는지 주말 내내 게을러서 글 한 편도 쓰지 않았는데 마침 이리 좋은 핑계가 있나 싶다.
감기는 약해진 인간에게 잠시 쉴 시간을 부여하는 신의 은총이란 말이 있다. 과부하로 불이 난 카카오 전산도 그러려니 생각하자. 우리는 잠깐 다수와 연락을 멈추고 쉬고, 또 너무 많은 것을 주고받지 말자. 매일 몸집만 불리는 카카오도 잠깐 좀 쉬고 내실을 다지자. 그런데 너는 핑계를 대지 말고 글을 좀 써라, 작가 금동은 씨.
카카오맵이 안 되니 도착 시간을 제대로 확인 못 해 이틀간 눈앞에서 버스를 세 번 놓쳤다. 오늘은 마을버스 방향을 거꾸로 타서 종점을 찍고서 돌아왔다. 선글라스 낀 기사님이 종점 다 왔는데 도대체 어디서 내리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회차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대답하고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그대로 동네 한 바퀴를 거꾸로 돌아왔다.
버스를 놓쳐 대기한 시간까지 포함하면 어제 오늘 버스에서 세 시간을 넘게 보냈다. 별생각 없이 챙긴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꽤나 지루했을 터이다. 오랜만에 그의 문장을 읽으니 미소가 지어지고 영감도 얻는다. 오랜만에 그를 따라 이렇게 짧은 수필도 하나 썼다. 다 카카오가 터진 덕택이다.
p.s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이 제일 잘 읽힙니다. 집에는 내 신경을 끄는 요소가 너무 많단 말이죠, 인스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