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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장 Nov 23. 2022

후투티와 하루키

어렸을 적부터 여러 시리즈의 책을 읽어왔지만 최초로 내가 완독했던 문집을 떠올려보자면 아무래도 <한국의 자연탐험>이 될 것 같다. 5년간 한라산부터 백두산까지, 한반도 곳곳의 자연과 동식물을 찾아 전문가와 사진사가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멋진 사진을 찍고 설명글을 적어 출판한 70권짜리 책 모음이다.


70권이라고는 하지만 큰 사진이 많고 두께는 얇아 금세 읽어내곤 했다. <봄에 피는 꽃>처럼 넓은 주제를 다룬 권도 있고, <삽살개와 진돗개>/<이끼>처럼 특정 종만 다룬 편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무언가를 읽고는 싶지만 또 길게 집중하기는 싫을 때, <한국의 자연탐험>이 꽂힌 책장으로 가 손에 잡히는 걸 꺼내 읽었다. 평균으로 따지면 권당 5회 쯤 읽었으려나.


그래서 그런가 어렸을 때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은 기억이 옅어져 많이도 잊었지만, 밖을 나가면 이름을 아는 동식물 천지였다.


가로수와 하천에 있는 새가 찌르레기인지 쇠백로인지 알았고 겨울나무 위 노란 열매 달린 가지로 지어진 까치집을 보면 ‘겨우살이’라는 본명으로 불러주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하나의 몸짓에서 꽃이 되는 걸 경험한 것은 김춘수 시인만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마 그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동식물들이, 그냥 머나먼 진화 갈래에서 분화되어 나와 관계없는 종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동물 친구들’이란 표현은 당시 내게 있어 상투적인 관용어가 아니라 인식을 담은 말이었다.



첫 근무지로 교도소를 배정받아 막 출근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일주일 쯤 지나서 부서 회식이 잡혔다. 아마 내가 새로 온 기념으로 추진했던 회식으로 기억한다. 교도소 내부의 부지는 넓고 또 안에 작은 정원도 있어 나무와 풀이 많아 산책하기 좋았다. 뒤편으로는 산이 병풍처럼 있어 날아오는 새들도 다양했다.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할 겸 다른 직원 분들 대여섯 분과 천천히 산책하며 퇴근하는데, 한 직원 분이 잘 다듬어진 향나무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 저 새는 뭐죠?”


크기는 3-40cm쯤 되려나, 작고 화려한 새 한 마리가 나무에 붙어있었다. 적갈색의 몸통에, 날개에는 호피처럼 줄무늬 배색이 있었고, 무엇보다 머리에 모히칸 모양으로 난 깃털 갈기가 인상적이었다. 옆의 분들도 갈기를 보고 ‘꼭 인디언 추장 머리 같네요’하며 웃었다.


한 직원이 딱따구리인 것 같다고 하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쪼는 건 볼 수 있나 - 궁금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새로운 근무지에 온 지 겨우 일주일, 튀지 말아야 한다는 한국 신입의 원칙을 지키려 잠자코 있으려 애쓰던 나는 그 '딱따구리' 라고 잘못 불러준 이름에 오지랖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나서서 정정을 하고야 말았다.


후투티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참... 후투티 같다.




“아, 저건 딱따구리가 아니라 후투티라는 새인데요 -“


“예? 후투티요?”








후투티라니, 무슨 스와힐리어에서 유래된 외래종 같은 이름으로 들렸을 것이다. 다들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아느냐는 반응이었다. 예전에 어디서 읽었다고 대강 얼버무리자 뒤에 부장님은 역시 명문대는 달라 - 하며 내 학벌을 치켜세워주었다. 안타깝게도 '후투티'를 아는 것과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윤무부 선생님께서 입시 전문가가 아니신 것처럼...... 장담컨대 내 치과대학 동기들 중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아, 혹시라도 있으시면 정정 요청을 남겨주세요)



오늘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데 그가 지식을 습득하는 책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글이 있었다.


그러한 기존 사전에 대한 평소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 것이, 영미 문학자이며 전문 번역가인 도비타 시게오 씨의 역작 <탐험하는 영일 사전>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책을 화장실에 놔두고서 매일 조금씩 오랜 기간에 걸쳐 독파했다. 도비타 씨 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식으로 읽어나가면 정말 유효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책이다. 출퇴근길이나 통학하는 길에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듯하다. 물론 서재에서 읽는다고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지만 말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비밀의 숲>, '좀더 인간미 넘치는 사전이 있으면 좋으련만'


중학생 때까지 나는 화장실을 갈 때면 항상 책을 들고 들어갔다. 독서가 길어지면 앉아있다 2-30분을 소요하기 일쑤였고, 얇은 책은 꼭 다 읽고 나와야 직성이 풀렸다. 그 시절 애용한 책이 바로 <한국의 자연탐험>이었다. 자세히 읽으려면 자세히 읽을 수도 있고, 사진과 첨언된 설명 위주로 가볍게 읽으면 10-15분이면 한 권을 끝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화장실에서 시작과 끝을 함께한 책은 수도 없이 많다. 내 독서력을 키운 건 팔 할이 양변기였으리라.


그러나 성인이 되고 휴대폰이 생기자, 화장실을 가는 내 손에 딸려오는 것은 보통 스마트폰이 되었다. 자동 추천을 따라 볼 생각도 없었던 영상을 보고, 관심도 없는 가십과 논란에 대한 쓸모없는 정보까지도 세세히 알게 되었다. 나름 시사교양 관련 채널 위주로만 보려고는 하나, 이는 인공지능 추천의 강력한 방해 의지를 간과한 행동이다. 어느새 알고리즘에 휘말려 30초짜리 댄스 쇼츠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럴 때면 게으른 자신의 민낯-바지를 입지 않은 반나체이기까지한-을 확인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진 않다. 해우소에서 나는 근심을 더해 나온다.


저기 세습 국가의 왕세자도, 국내 재벌 기업의 총수도, 또 어느 나라의 대통령도 화장실을 갈 때 무언가를 들고 갈 테다. 확인을 안 해보아 모르지만 장담컨대 절반 이상은 스마트폰을 대동해 들어갈 것이다. 퐁당, 풍덩 소리를 배경으로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면서. 그런 상상을 하면 세상 어떤 슈퍼스타라도 그렇게까지 나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업적은 업적대로 대단하고, 배설은 배설대로 추하다. 배설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해야할까. 근엄한 위인도 화장실에만 가면 바지를 내려 헐벗고, 노폐물을 비우고, 자위를 하고, 교양과 거리가 먼 영상을 보며 감정을 정화하고 -  갖가지 배설을 할 것이다. 아무도 볼 사람도 없고 제 멋대로 해도 아무 상관없는 공간에서.


화장실은 그 어떤 곳보다 프라이빗하여 비밀이 보장되는 공간이지만, 날 것의 자신을 직접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타인의 눈이 없는 공간이기에 내 멋대로 해도 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 어느 곳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비밀의 숲에서 억눌리지 않은 태초의 내가 하는 행동, 어떤 강제성에도 왜곡되지 않은 진실한 자아의 행동이기에. '진짜 나'는 온전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무엇을 하는가?  - 그건 오로지 화장실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존재의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나는 자신에게 떳떳한 행동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떠올리며, 구토와 배설의 공간 - 화장실에서. 이리저리 꼬아 적어놓았지만 요지는 이렇다. 화장실을 갈 때 폰 대신 책을 들고 들어가겠습니다, 사유, 그런 내가 좀 더 멋져 보여서.


오전에 별생각 없이 하루키 에세이를 읽다가 위 일련의 생각을 떠올리며 이런 다짐을 했다.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다는 글 때문에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지, 후투티가 가축의 대변을 뒤져 벌레를 잡아먹고 산다는 사실 때문에 연상된 건지는 모르겠다. ‘후투티’라는 이름이 어쩐지 ‘하루키’와 발음이 비슷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오전에 화장실에 어떤 책을 둘지 고민을 좀 했다.


아무래도 장편 소설과 철학서는 책상에 앉아 차분하고 끈기 있게 읽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보 서적이나 단편 에세이집이 역시 화장실에 제 격이다. 오늘 읽은 하루키 에세이집도 마찬가지고. 양변기 뒤편 선반을 정리해 <비밀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을 곱게 올려놓았다. 책상에 앉아 읽는 대신 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한두 편씩 읽어야겠다. 하루키 씨도 섭섭해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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