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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장 Dec 27. 2022

전도는 소고기일까 -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상대적으로 값이 저렴한 돼지고기는 아무런 대가 없이도 베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소고기라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던 보상을 바라고 사주는 것이니 경계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의 경험을 비춰보면 나름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이다. 별 이유 없이 한우를 갑자기 사준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아할 것 같지 않은가. 회사 신입들을 모아 선배가 사주는 막걸리라면 후배들에 대한 순수한 호의이고 바라는 것도 옅은 친분 정도겠지만, 한 명을 콕 집어 와인을 사주는 건 반드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니 이성 선배가 사줄 때는 반드시 경계하도록 하자.


하지만 살다 보면 이것이 돼지인지 소인지 구별이 어려울 때도 많다. 낯선 이의 친절을 누군가는 미디어의

부정적인 뉴스를 떠올리며 방어적으로 대하고, 누군가는 의식적으로라도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려 애쓰면서 세상의 온기를 믿으며 산다. 나는 그중 후자에 가깝다. 가끔은 친절을 베푸는 바로 그 낯선 이가 되려고 하기도 한다. 친절과 배려가 부탁과 요청보다 쉬운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런 세상이 좋다.



지금 출근하는 직장이 지대가 좀 높은 곳에 있다. 큰 도로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15-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데, 경사가 완만하긴 해도 여간 귀찮고 진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 오고 눈 오고 하는 날엔 막막하기도 하다. 그래도 휴대폰으로 노래 틀고서 아무도 안 걷는 쪽길로 세네 곡 정도 흥얼거리며 가다 보면 도착하니, 나름 즐거운 마음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가끔 혼자 퇴근길을 걷는 나를 보고 차 타고 가는 직원 분들이 아래까지 차를 태워주시기도 한다. 400명 가까운 직원이 일하는 곳이라 얼굴이 익숙지 않은 분들도 많지만, 내리막길에 굳이 차를 세우시고 창문을 열어 옆좌석을 권하는 낯설고도 익숙한 분들을 보며 따뜻한 세상에 믿음을 한 스푼 올리게 된다.

그래, 이건 돼지고기다, 하고.


오늘 오후부터 시작해 눈이 꽤나 내렸다. 나이를 먹으니 겨울 왕국의 환상은 깨진 지 오래다. 안 그래도 내리막길인데 눈까지 쌓이니 미끄러워 자세를 잡기가 어려웠다. 조심스레 걷고 있는데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차가 천천히 멈추더니 창문을 내렸다.


 "괜찮으시면 아래까지 태워드릴까요?"


직원으로는 안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이때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상대방의 외모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함유한다-그렇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사실.


둘째, 아무리 수렵 사회가 끝난 지 오래고 문명의 발전으로 근력이 사회적 의미를 잃어가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내가 체격 있는 남자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는 사실.


그분은 꽤나 선한 외모와 선한 말투로 나를 차 안으로 인도했고, 내 머리는 혹여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저 정도면 나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뒷좌석에 누가 있는지도 확인조차 안 하고 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겁 없는 행동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아니라 효도르가 탔더라도 뒤에서 주사 한 방 꽂으면 그대로 인신매매당했을 테니.


자연스레 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왔다. 그분은 스스로를 어디 교회 장로라고 소개하며, 수용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함께 기도를 하러 교도소에 들어 온다고 했다. 돌아가는 길에 가끔 면회를 하고 내려가는 사람이 보이면, 한 번씩 이렇게 멈춰 서서 친절을 베푼다고. 내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셔서 내 집 방향을 말하고 보니 그분의 목적지와 정반대 쪽이었다. 이렇게 되면 집까지 태워다 주시는 게 좀 부담이 되질 않나. 내가 친절을 베풀더라도 그렇게까진 부담스러울 것 같다.


나는 공통 경로인 버스정류장 가는 길까지만 부탁드린다고 밑에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분은 한사코 직접 집까지 태워다 주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는 굳이, 굳이 끝까지 내 집 근처까지 내려주신 후에 차를 돌려서 반대 방향의 자기 집을 가신다고 했다. 그때 이건 순수한 호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아, 이건 소고기, 살치살이구나.


교회는 다니냐, 얼마나 다녔냐, 이 책을 줄 테니 한번 믿어봐라, 이름이 어떻게 되냐, 명함 줄 테니 언제든 연락하고 우리 교회에 와봐라 - 각종 대화를 나누며 15분 남짓한 시간 오랜만에 신선한 인사이트를 경험하며 집에 도착했다. 그는 내게 자기 부모님과 친척들도 원래 안 믿었다가 꾸준한 전도로 예수님 말씀 아래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전도란 호의인 것일까? <하나님 믿으세요> 보다 <예수님 믿으세요>를 많이 주창하는 교회 사람들은 전도를 봉사라고 생각할까, 영업이라 생각할까? 전도를 거부하면 살육을 자행해온 서양의 식민 지배 역사와, 믿음에 대한 방법론의 미세한 차이로 수백 년간 전쟁을 펼친 신/구교 갈등을 생각하면 전도를 도무지 순수 봉사로만 보기는 힘들긴 하다.


살육을 금지한 건 절대다수의 종교가 매한가지인데, 불교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니, 3대 종교인 이슬람도 '한 손엔 코란-한 손엔 칼'이 표어였으니 오히려 불교가 이상한 종교일지도 모르겠다. 유일신교 두 개가 이렇게까지 확장세를 펼친 건 그 어떤 이유도 아닌, 봉사와 영업과 협박 - 그 어디쯤 있는 그들의 전도 활동 덕분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에게 어떤 계기로 그렇게 열성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예전에 지인들과 단체로 점집을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점쟁이로부터 '기독교인이 있으면 귀신이 오기 힘드니 당신이 나가야지만 점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때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음을 깨달았다고...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써 귀신을 물리치시잖아요."


그분의 허허 웃음에 송강호 씨 마냥 예, 예 압니다, 알죠하고 말았다.


장로님은 그냥 눈길에 차갑게 걷는 이가 짠해 보여 태워주신 걸까, 짧은 시간 전도를 하고 싶었던 걸까. 예수님을 모르는 불쌍한 이들에게 그 세상을 보여주고 행복을 나누고 싶은 걸까, 전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천국에 가까워지기 위해 영업하는 걸까.


목적이 무엇이었건 간에 애석하게도 오늘은 그의 전도가 내게 소고기-돼지고기 하는 글만 남기는 경험으로 치환되었다. 내 명함 있으면 나중에 연락을 주게 달라고 하셨는데, 귀신 얘기를 듣고서부턴 차마 드릴 수가 없어서 지금은 없다고 한 것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아, 이런 걸로 거짓말하면 하나님은 날 지옥에 보내시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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