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탈 프리즈너(4)
내 첫 근무지는 외국인 교도소였다.
"한국에 외국인 교도소 같은 것도 있어요?"
대한민국엔 소수자를 위해 만든 교정 시설이 두 군데 존재한다. 청주에는 여자 교도소가 있고(적어도 교정 시설에서만큼, 여성은 압도적인 소수자이다), 외국인 교도소는 천안에 위치해 있다. 삼거리로 유명한 도시답게 천안은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고, 그래서일까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건너온 수용자들이 6-700명가량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도소의 내정문을 통과해 의료과로 향하는 복도 좌측엔 아주 큰 운동장이 있었다. 신체 활동과 일조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수용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나와서 제각기 운동을 했다.
항상 철봉 앞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운동장 가장자리엔 몇 바퀴고 걷고 뛰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지었다. 덩치에 안 맞게 배드민턴을 치는 수용자들이 아주 많았었는데, 얼핏 듣기론 최대한 몸싸움이나 다칠 위험이 적은 운동을 권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축구는 허용되지 않았다. 장담컨대 한국에서 남자만 수십 명 모아놓은 대운동장에서 축구를 금지시키는 경우는, 교도소 밖에 없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복도를 걸으며 운동장을 바라보면, 말 그대로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흙바닥에 모여있었다. 우락부락한 흑인이 턱걸이를 했고, 대머리 문신 동양인은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수용자들은 축구를 못하는 대신 족구를 했다. 크게 다양한 언어로 소리를 지르며 공을 주고받는 모습은 세상 어디를 가도 못 볼 광경이었다.
발놀림이 어설퍼보이는 미국인-WSAP스러운-이 서브를 올리면, 멀리서 키 작은 두바이 사람이 공을 받았다. 어깨에 삼각근이 도드라지는 흑인이 슬쩍 제기를 차듯 토스를 올리면 체구가 단단해 보이는 중국인이 날아올라 가위차기로 경기를 끝내버렸는데, 긴 붉은 수염을 가진 동유럽 사람은 어설픈 한국어로 "아니, 그것도 못 받냐?" 동료(?)에게 핀잔을 줬다. 매일이 블랙 코미디였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똑같아도 되나?
교도소 내 치과로 찾아오는 수용자들도 당연히, 외국인이 많았다. 삶의 첫 외국인 진료를 수용자로 시작하는 건 당황스럽고도 재밌는 일이었다.
첫 진료를 보던 날이 기억에 난다. 진료실에 첫 환자가 들어와 어디가 불편한지를 물었는데, 대답을 중국말로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자 옆에 교도관 선생님께서 통역을 불러주신다 했다. 곧장 복도에 대고 "태식아~!" 크게 외쳤다. 어려보이는 뿔테 안경을 쓰고 노란 조끼를 입은 동생뻘이 들어와 통역을 해주며 나머지 진료까지 수월하게 마쳤다.
교도관 분께 아까 그분은 여기서 통역 일 해주시는 분인지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 태식이요? 걔 보이스피싱으로 들어온 놈인데요."
야-매 통역사는 중국어 사용자가 삼백 명이 넘고, 그중 조선족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통역이 불가능한 언어가 훨씬 많았다. 영어로 진료를 보는 것까진 괜찮았다. 가끔 한국어를 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영어만 하는 수용자들이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무료로 스피킹 연습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상엔 200개국이 넘는 나라가 있고, 태국, 우즈베키스탄, 잠비아 등등, 생각지도 못한 나라의 국민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질러서 들어왔다.
파파고에 "두드릴 테니까 아프면 왼손을 들어요."를 러시아어로 검색할 줄을, "이 치아는 충치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어서 아프면 뽑아야 해요."를 스와힐리어로 번역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다.
그날은 유달리 기분이 좀 안 좋은 날이었다. 그 감정의 이유까진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나 쉽게 잊을 일에 나는 왜 그렇게 골이 나있었나 싶게, 그냥 가시 돋친 내 말투와 행동 - 그 장면만 기억난다.
환자가 많은 날도 아니었다. 딱히 난동을 피우는 환자도, 꾀병을 부리는 수용자도 없었다. 날은 맑고 평온했다. 점심도 잘 먹었고, 일하시는 교도관 분들은 친절했다. 그냥 나만 문제였던 날인 것이다.
오후 진료가 시작되고 시간이 좀 지나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평범한 체형의 흑인이 들어왔다.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어디가 아픈지를 말했는데,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상냥했고 일관된 저자세를 보였다. 진료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연발했고, 내가 설명을 할 때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내리며 "아, 네네." 경청의 반응을 보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진료 내내 툭툭, 무신경함과 귀찮음을 내뱉었다.
염증 때문에 잇몸 쪽이 부어있던 터라 가볍게 세척과 소독을 진행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치를 마치고 다음 환자를 부르고 있는 와중에, 그는 내게 정확히 "선생님, 괜찮으시면 진통제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뭐가 대체 울컥했던 것인지, '어련히 알아서 해줄 텐데 뭔데 이래달라 저래달라야, 말도 섞기 귀찮게' 란 생각을 했다. 나는 무례함을 온몸으로 표현해 어떻게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듯, 귀 기울이는 것조차 귀찮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투로, "알아서 할 거니까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진료 내내 미소만 서렸던 그의 눈빛은 내 발언과 함께 수염이 탄 정중부의 분노처럼 변했다. 그는 우두커니 멈춰 서더니, 어눌하지만 강단있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나 지금까지 계속 좋게 말했잖아. 나도 사람이야."
뜻이 분명한 그의 한국말에 나는 뒤통수를 아주 세게 맞은 듯 먹먹해졌다. 나는 저 사람이 뭐라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듯 감정을 툴툴거리며 배설했던가. 그는 오늘 그저 한 명의 예의 바른 환자였을 뿐인데.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자세를 낮추어 사과해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성의 없게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분명 그 찰나의 마음은 반성을 했다.
그러나 일이 커지며 상황이 틀어져버렸다. 옆에서 진료를 보조해 주시던 교도관 선생님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야, 너 지금 우리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어?"라며 달려든 것이다.
수용자는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그러자 복도에 있던 CRPT(교정시설 기동순찰팀)가 무전을 받으며 달려와 그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가버렸다. 수용자는 멀리 복도로 끌려가면서도 내가 너 기억할 거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 쉬지 않고 외쳤다.
(교도관 선생님께서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시려고 한 것이니 매우 감사하고, 또 우발적인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타이밍이 좀 안 맞았었다.)
소란이 지나가고 곧 이어진 진료까지 다 마쳤다. 진료실을 정리하면서 옆에 계신 선생님께선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종종 이런 일 있으니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안심되는 미소와 달리 내 마음은 굉장히 불편했다. 그 수용자는 아마 소란을 피웠으니 징계 비슷한 것을 받을 확률이 컸다. 바깥 사회였다면 생각지도 못한 전개인 것이다. 그는 내내 상냥했고, 시비를 건 사람은 나였으나 끌려간 건 그 사람이었다. 물론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린 것은 그가 분명했으나, 감정 조절을 못했다는 점에서 나도 매한가지 아닌가. 나만 아니었다면 문제조차 안 생겼을 하루였다.
조용히 옆의 교도관 선생님께 가서, 아까 그 수용자와 잠깐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어유, 선생님 진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뇨, 그냥 제가 사과하면 일 크게 안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는 CRPT의 동행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할 말은 많지만 선배에게 혼나는 중이라 고개만 숙인 후배처럼, 시선을 회피하며 입이 삐죽 나온 채로 있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가 하루 종일 기분이 정말 안 좋았다. 하지만 내 감정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됐는데, 내가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 성의 없이 너를 대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약 처방은 따로 진통제를 포함해서 5일 치가 나갈 거다. 기분 풀었으면 좋겠다."
감정이 태도가 되어선 안 되었다는 표현을, 우리말이 어색했던 그가 다 이해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조곤조곤한 말투와 미안한 표정만큼은 잘 전달되었던지, 그가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했다. 미국 흑인 같은 악수와 함께 서로의 어깨를 툭 쳐주며, 이걸로 다 털었다는 듯, 이제 너는 나의 친구라는 듯. 다행히 그에게도, 나에게도 별일은 없었고 몇 달 뒤 나는 그곳에서 다른 교도소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날이 교도소에서 진료를 시작한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일 것이다. 그즈음 나는 반복되는 행위와 설명에 지루함만이 내 일상을 덮고 있다 느끼고 있었다. 수용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싶어질 만큼, 얼굴만 보아도 스멀스멀 퉁명스러운 날숨이 나오던 시기였다. '저 녀석들은 남의 땅에 와서 깽판 치고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네' - 대한민국에 땅 한 마지기도 없는 녀석이 ‘우리 땅’을 운운하며 제노포비아(Xenophobia)가 눈과 뇌에 씌워지던 참이기도 했다.
그 이후론 교도소에서 별 다른 소란을 겪은 적이 없다. 다른 의사 동료가 수용자와 언쟁을 벌이는 걸 한두 번 본 게 전부다. 쉽사리 끓어 넘치며 손대기 무섭게 따끔거리던 내 언짢음도 사라졌다. 그날 그가 어눌한 방식으로 굳은 머리를 잘 깨부수어준 덕도 있지 않나 싶다.
앞으로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하며, 아마 수십 년간 똑같은 행위와 똑같은 설명을 반복할 것이다. 수천, 수만 명을 대하다 보면 미처 다 걸러내지 못한 부정적 감정들이 쌓여 편견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반복에서 오는 무료함이 감정이 되고 또 태도가 되려 한다면,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며 스탑사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