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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장 Oct 22. 2023

교도소에 들어왔습니다

덴탈 프리즈너 (2)

새로 사람을 만날 때 내 직업은 치과의사이고 근무지는 교도소라고 하면, 상대방은 상상도 못 한 정체였다는 듯 여러 질문을 하곤 했다 - 나도 내가 수감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거기서 무슨 일을 하냐, 왜 거기서 일하게 되었냐, 등등 다양한 선제 질문들이 있었지만, 경험상 두 가지 질문은 항상 나왔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성별에 따라 좀 차이가 있었는데, 여성 분들은 “무섭진 않으세요?”를 물었고, 남자들은 “연예인 본 사람 없어요?”를 물었다. 나의 안위와 공포에 대해 걱정해 주는 남성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뭐, 나도 여자가 걱정해 주는 편이 더 좋다.



나는 그곳이 무서웠었나 -


처음 교도소에 출근했을 때의 감정은 두려움보단 낯섦에 가까웠다. 바깥 정문을 통과해 걸어가다 다시 내정문 앞에서 신원 확인을 하는 곳,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넓고 전원적인 부지,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하늘색 수감자들, 마주치는 직원마다 손을 올려 경례를 하는 것도 전부 낯설었다. 따지고 보면 군복무를 대체하는 것이긴 해도 말이다.


문신을 새긴 사람을 정말 많이 상대했던 것 같다. 덕분에 문신한 사람에 대한 이유 없는 두려움은 사라졌다(거부감은 오히려 좀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한참 동생 같은 나이대에 별생각 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있고, 진료를 보면서 치과를 무서워하는 문신쟁이가 많다는 걸 느낀 것도 있다.


덩치는 산만하고 몸엔 잉어와 용이 그려져 있는 사람일수록 마취 주사를 그렇게 무서워했다. 발치를 해야 하니 마취부터 해야 한다고 하면 쭈뼛거리며 주사가 많이 아픈지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기가 차다는 듯이 핀잔을 줬던 것 같다.


"아니, 온몸에 그림도 그려놓으신 분이! 애들도 다 하는 거예요."


내가 키가 크고 보통 이상의 체격을 가진 것은, 적어도 여기서 일하는 입장에서 심리적인 축복이었다. 대부분의 수용자가 나보다 체격이 비슷하거나 작으니, 유사시에 갑자기 덤벼들더라도 1차적인 방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망상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무서움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190cm에 100kg쯤 되어 보이는, 압도적으로 큰 사람이 진료실에 들어온 경우에는 잠시 말문이 턱 막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과 사람에 익숙해지다 보니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실제로는 수용자 집단이라고 항상 분노에 치밀어 있다거나 수시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결코 아니다. 내가 느낀 타 집단과의 가장 큰 차이는, 함께 일했던 의사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하는 바가 제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의료과에서 난동을 부리는 수용자의 상당수는 원하는 약을 처방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마약성 효과를 노리는 사범 등, 약물 오남용을 이유로 의사의 판단에 따라 처방을 거부하기도 하는데, 사실 나보다 의과 선생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나이롱환자들을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선입견도 생길 것이고, 그러니 일반적이지 않은 증상을 호소하는 수용자를 보면 '저 인간은 또 무슨 거짓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의료과 사람들끼리는 그런 공감대가 있었다. 수용자들을 뭐가 예쁘다고 무료로 진료해줘야 하나, 돈을 조금이라도 받기 시작하면 아마 환자 수는 십 분의 일로 줄 것이라고.



연예인 본 사람 없냐는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답을 하자면, 사실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만남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유명한 사람을 종종 봤었다. 하루는 덥수룩한 남자 한 명을 진료했는데, 교도관 선생님이 아까 그 사람 모르겠냐고 묻는 게 아닌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를 보이자, 가수 OO이라고 말해주었다. 아, 나도 종종 듣던 노래를 불렀던 가수였는데, 어쩐지 언젠가부터 삼인조 그룹이 이인조로만 활동하더라니.


그 외에도 마약 혐의로 들어온 힙합 가수나(함께 일했던 선생님은 팬이라고 초코파이를 줬다)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살인 사건의 범인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진료 본 사람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유명인은 구속된 정치인이었다.


너무 아프니 진료를 빨리 잡아달라는 요청을 반복적으로 했다고 하는데, 국회의원이 면회를 왔다느니 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를 상대해야하는 교도관들도 꽤나 압박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매우 이례적으로 몇 주는 걸릴 치과 진료 대기 명단을 무시하고, 이틀 만에 논스톱으로 진료실로 걸어 들어왔다. 막상 내가 진료를 볼 때는 그는 아무 통증도 없었고, 그저 아주 오래 전에 신경 치료한 치아가 파사삭 부러진 것뿐이었다.



그렇게 3년 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나는 사회로 나왔다. 반복적인 일상에 벌써 당시의 기억은 희미해져, 이따금씩 내가 썼던 글을 읽고 나서야 장면이 그려진다. 수필이 된 글과 술자리의 말로 압축되어 버린 3년을 되짚다 보면, 원 없이 책을 읽고 지인들과 술을 마시던 그때의 공기가 추억으로 보정되기도 한다. 추운 겨울 날씨가 아름다운 하얀 입김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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