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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장 Oct 14. 2023

[아픔]의 범위

덴탈 프리즈너 (3)

일반적인 치과에서와 달리 교도소 내의 치과의사는 환자를 마주하기 전까지 환자의 주된 불편사항(Chief Complaint, 주소)을 알 수 없다. 안에서 수용자를 체어에 앉힐 때면, 나는 으레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진료를 시작하곤 했다.


“어떤 것 때문에 오셨을까요?”


그래서 환자의 상황에 맞춰 미리 기구가 세팅되어 있는 외부 치과와 다르게, 교도소에선 체어 사이드에 준비되어 있는 기구는 항상 핀셋과 덴탈 미러뿐이다. 당연히 술식을 하려고 치면 기구 세팅에 준비도 따로 해야 하니 시간도 오래 걸린다.


아, 참고로 나는 질문을 할 때 일부러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을까요?’와 같은 뉘앙스는 지양하는 편이다. ‘아프다’는 언어를 통해 질문을 하게 되면 괜히 더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는 심리학 글귀를 읽은 적이 있어서. 뭐, 이 글에서 중요한 내용은 아니긴 합니다만.



여자 환자(수용자)를 동행 진료하는 날이었다. 주민(?) 대다수가 남성인 성분포 특이 집단 - 교도소에선 가능한 여성과 남성을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을 조절한다. 의과를 포함한 진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날은 아마 여섯, 일곱 명 내외의 여자 수용자만 진료를 봤던 걸로 기억한다.


베트남이었나, 태국이었나, 한국어가 완전하지 않은 환자였다. 자리에 앉히고, 천천히 다가가 나긋이 물었다.

”어떤 것 때문에 오셨을까요? “

이 질문에 그녀는 ‘입냄새‘가 나서 고민이라고, 그래서 왔다고 했다.


환자를 대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주소(Chief Complaint)를 들을 때가 있다. 보통은 시리거나 욱신거린다고 말을 하는데, 이가 ‘뽑히는’ 느낌이 든다고 하거나 이가 끈적(?) 거려 혀가 달라붙는다 하는 환자도 있었다. 학창 시절 한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인데, 밤마다 머리가 한번씩 열린다고 하는 환자가 온 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 골 때리는 증상 설명에 우리 교수님은 아주 현명한 처치를 해주셨다. “그럼 오늘 밤에 머리가 열리시면 그 사이에 종이를 끼워서 내일 오세요. 제가 말끔히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 교수님의 굵직한 연륜이 존경스럽다.


cf. 타교 출신 치과의사 분과 점심시간에 잡담을 하다 이 이야기를 해줬는데, 글쎄 자기네 학교에서도 똑같은 미담을 가지신 교수님에 있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교수님이 허언을 한 것일까.)


아무튼 그만큼이나 환자들의 호소 양상은 다양하고, 또 사실 그게 정상이다. 의사가 학교에서 교과서적으로 배우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는 환자는 없다. 아프지 않고 ‘불편하다’고 해도 해결을 해줘야 하고, 불편도 아니고 ‘조금 다른 것 같다’는 반응이어도 해결을 해주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반적인 진료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불만도 다 들어주겠다는 마음속 작은 선서는 교도소에서 그 목소리를 잃는다. 진료가 밀려 대기하는 환자가 많은 것은 차치하고, 그들을 이곳에 있게 한 이유는 괜스레 그들이 정당한 진료를 받을 권리도 조금은 앗아가야만 한다고, 나의 좁디좁은 편견이 속삭인다. 치열이 삐뚤거려 교정을 하고 싶다는 요청을 할 때, 어디가 아파서 왔냐는 질문에 아픈 곳은 없고 그냥 나가기(출소) 전에 한 번 검진이나 한 번 받으려고 왔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 속삭임은 옅은 분노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상악 중절치(앞니) 사이가 벌어져서(Diastema라고 한다), 그 사이를 메꾸고 싶다는 외국인 수용자가 온 적 있었다. 통증도 없는데 미용 목적으로 여기서 그런 것을 해줄 수 없다, 그러니 나가서 하라고 하자

 

“한국에서 치과 치료를 받는 게 싸다. 나는 출소하면 바로 내 나라로 추방이기 때문에 여기서 해야 한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게 있어서 형벌은 징역이 아니라 추방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잘 타일러 돌려보냈지만 그는 2주쯤 뒤에 다시 진료를 신청했다. 앞니 사이가 벌어져서 ‘너무 아프다’는 주소와 함께. 아프다고 하면 라미네이트라도 해줄 줄 알았을까, 딱히 영리하지도 못해 영악이란 표현도 쓰기 아까운 수용자의 태도는 진료실에서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는 수용자를 대면할 때 추가적으로 하는 질문도 생겼다. “그래서, 아픈 곳이 있나요?” 하는, 의심과 핀잔의 경계 턱밑까지 찬 뭉뚝하지 못한 공기가 담긴.


일련의 과정으로 변화되어 있는 나에게, ‘입냄새’를 주소로 수용자가 진료실에 들어온 것이다. 통증이 있냐는 질문에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그 시점에서 화가 나기보다는 기가 찼다. 사회였다면 이 사람이 자기 돈을 지불해 병원에 과연 갔을까, 하는 생각과 여기서 그런 걸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교도소의 진료에도 비용을 청구해야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며.


치석과 치태가 많은 케이스라면 스케일링이 구취 감소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런 편도 아니었다. 구취가 병적으로 심한 상태도 아니고, 여기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특별히 없으니 돌아가라 했다. 출소하고 바깥 병원에서 자기 돈 내고 진료를 받아보라는 말과 함께.



이 날 모든 진료가 끝나고 치과 업무를 도와주시는 교정 공무원 분과 함께 뒷정리를 하다 푸념을 좀 했다. 통증 있는 수용자만 봐주는 것만 해도 업무가 많고, 더군다나 저런 ‘같잖은’ 문제로 진료를 봐주는 건 좀 어이없는 것 같다고, 교정 시설 진료에도 비용을 부과해야 한다고.


교정 시설에서 근무한 지 십 년 가까이 되셨을 선생님은 함께 맞장구를 쳐주다, 연륜에서 나온 상황 설명을 보탰다.


“아마 같은 방 쓰는 애들이 좀 뭐라고 한 모양이네요. 특히  덩치가 작은 외국인이고 그러면 괜히 타깃 삼아서 괴롭히는 애들이 있거든요.

사동 관계자한테 들어보니 별 것도 아닌데 옆에서 입냄새 나니까 꺼지라고, 그런 말을 하며 따돌린 것 같습니다. 이전 진료 기록 보니까 거의 진료 신청한 것도 없네요.

꾀병 같은 건 아닐 거예요.”


통증, ‘아픔’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온갖 최첨단 검사 장비와 교과서적인 기준에 맞춘 진단으로는 분간해내지 못했을 그의 아픔이다. 요즘에도 마취 주사에도 벌벌 떨거나 작은 스침에도 소스라치게 아프다고 하는 환자들을 보면, 아프지 않은 아픔을 말한 그가 가끔 생각난다. 내 아픔도 누군가에겐 안 보이리라 생각하며, 안 보이는 아픔을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내가 되어야지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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