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탈 프리즈너 (1)
제도와 세간의 인식은 서비스라고 말하긴 하지만, 여전히 의료인에게 봉사의 개념이 탑재되어 있길 원하는 모양새다. 수가*는 나라에서 정해주었고 의료법은 단순 상행위 이상을 규제하고 있으며, ‘사람을 살리는’ 혹은 ‘생명을 다루는’이라는 찬사와 중압감을 버무린 수식어로 높은 도덕성과 대가 없는 책임감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자본이 높은 순위의 선(善)이 되어가는 세상, 나를 포함한 의료인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좋을지 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수가* : 의료행위의 가격)
이를테면 가난한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왔는데,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 좀 더 확장해서, 좋은 재료를 쓰는 걸 권하고 싶은데 가격 때문에 고민하는 환자를 볼 때도 마음이 뒤숭숭하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성격은 업무 스트레스적인 부분에서도, 벌어들이는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사업주 입장에서도 유리한 자질은 못 된다. 선배들 말을 들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인간미’가 차츰 무뎌진다고도 하고 또 스스로도 그걸 느끼고는 있지만, 그게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러한 측은지심은 교도소에 들어서 수감자를 만나면 한층 복잡하게,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발동되었다. 범죄를 통해 시민에게 피해를 입힌 이들에게, 어떻게 보면 평균적인 도덕성과 준법 의식이 일반 집단에 비해 현저히 낮을 이들에게, 나는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품고 또 의료인으로서의 배려를 행해야 할 것인지.
꼭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때리고 들어와 놓고선 너무 아프니 최대한 빨리 치료해 달라는 폭행 사범을 진료할 때, 수백 억대 사기로 들어와 놓고선 돈은 충분하니 제일 좋은 진료를 해달라는 사람을 볼 때(과징금은 미지급인 상태인), 나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곱씹게 되었다.
선입견 없이 진료를 보려고 노력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곳에서의 표정, 말투, 태도가 내 평생 진료 습관이 될지도 모르기도 하기에, 가능한 친절과 배려를 몸에 배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심한 신경통을 호소하던 환자가, 그래서 순서를 앞당겨 최대한 신속한 치료로 마무리해 준 그 환자가 산으로 여아를 데리고 가 성폭행을 한 중년 남성 범죄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 그런 종류의 경험들은 나를 아무래도 까칠하고 편견에 잡힌 인간으로 조금씩 변모시켰다. 그러면서 좀 느낀 것 같다. 경험이란 것은 이렇게나 파괴적이고 단단하구나.
어느 날 희끗희끗한 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50대 남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위아래 이가 많이 없어 아래턱은 튀어나오고 아래 입술이 위로 말려 올라간 안모였다. 속칭 ‘합죽이’라고도 한다. 예순은 족히 넘어 보여 틀니 제작에 보험 적용이 되려나 싶어 나이를 물어보았는데 쉰 초반이라는 말에 아주 놀랐을 만큼, 폭 늙어버린 외양이었다.
위아래로 모든 이가 없는지는 오래되었고, 6년 전에 틀니를 잃어버리고서는 그 이후로 쭉 이렇게 살았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음식을 먹고살았는지, 왜 그동안 아무런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체어에 눕히고 라이트를 켜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래에 부러진 작은 치아 조각 하나가 빠지지 못한 채로 있었다. 이건 발치하고 위아래 완전 틀니를 제작하는 쪽으로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아 영치금이 있는지 물었다.
영치금은 교도소에서 물건을 구매하거나 전화를 할 때 사용하는 돈으로, 바깥, 즉 사회에 있는 지인이 직접 부쳐서 넣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영치금이 없는 환자들은 보통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밖에 지인에게 편지 써가지고 영치금 좀 넣어달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구치소 계좌에 2000원 남짓만이 들어있던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밖에 XX은행 통장에 제가 그래도 150만 원이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한테 비밀번호를 알려드릴 테니까 어떻게 여기 안으로 넣어주실 수 있을까요.”
알다시피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바깥 사회에서 신분증이 있어도 안 될 일, 여기서 내가 그의 계좌를 열람하고 송금까지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중에 듣게 된 그의 죄목은 무전취식이었다. 감자탕 집에서, 뼈해장국 한 그릇과 빨간 뚜껑 소주 한 병을 시켜 먹었다. 틀니도 없어 밥알 하나 잘게 뭉개지 못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등뼈에 붙은 살점을 먹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는 ‘지불할 능력과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음에도 피해자에게 금전적 손실‘을 입힌 죄목으로, 만 사천 원을 시간으로 치환한 석 달짜리 징역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죄의 옹졸함은 어찌 죄인에 대한 연민이 되는 것일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던데, 정반대의 자세도 지녀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민폐 끼치며 살 정신이면 차라리 알바를 해라’, ‘기초수급자 신청하는 것도 모르나’ - 나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냉철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가벼운 돌팔매에게 저런 몰골로는 알바로 채용되기조차 쉽지 않다고, 서류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일 거라고, 삶의 의지가 무너져버린 사람일 것이라고, 그런 종류의 반박을 하고 싶진 않다. 그저 나는, 제대로 도울 자신도 없으면서 신경이 쓰이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고작 하는 것이라곤 등뼈에서 살을 발라내듯 감정에서 말을 발라내어, 이렇게 글이나 하나 남기는 일이다.
한동안 거슬렸을 치아 조각 하나를 빼내주고, 출소 얼마 안 남으셨으니 사회로 나가서 병원 상담받으시라 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수년이 흘렀다. 그도 출소해서 대한민국 한 골목 어딘가에서 숨을 쉬고, 밥도 먹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가 무엇으로 밥을 먹고 있을지
- 틀니일지 잇몸일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