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한강의 추적
잔잔한 내 마음에 불을, 아니 오물 풍선을 떨구는 일상적 감각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길을 걷다 코로 흘러온 담배 냄새, 다른 하나는 모기 소리. 나는 해맑게 웃으며 걷다가도 저 둘을 감각하는 즉시 신경이 곤두세워지고, 손을 마구 저으며 인상을 찌푸린다. 애석하게도 담배 연기와 모기의 공통점은,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젯밤엔 잠을 설쳤다. 그냥 설친 게 아니라 서럽게도 설쳤다. 허리를 삐끗해 병가를 내고 며칠을 누워있는 중이다. 허리 다치는 거야 슬프게도 어느덧 익숙해져 버려서, 이젠 그냥 ‘연말 정산 기간인가 보다’ - 체념하는 법을 배웠다. 그간 진료를 보며 헛되이 소모한 인대와, 제멋대로 굴려댄 근육이 매긴 세금이라 생각하고 일주일의 휴식으로 성실하게 납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실 납세자를 괴롭히는 이, 이, 위잉위잉 혁오도 아닌 녀석이, 기동력을 상실한 환자를 잠 못 들게 했다. 내가 모기라면 몰래 다리의 혈관이나 빨고 조용히 살 텐데. 그들은 왜 굳이 굳이 목숨을 걸고 내 귓가에, 머리로 올라와 거인을 깨우고 도망가는 것일까?
혹시 어두육미라는 사자성어를 반대로 이해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더니, 비뚤어진 고함을 내지르며 앵앵거리는 모기가 너무 밉다. 나는 허리도 못 꺾는 뉘인 풍선 인형이 되어 팔이나 휘적거리며 있었다.
애초에 가을이 오면,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던 옛말은 이제 정말 옛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기가 여름은 좋아해도 ‘한여름‘은 피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는 요즘이다. 올여름은 세 달 내내 삼십 도를 넘는 한여름이었으니, 모기들은 어디 단체로 피서를 갔다가 처서가 지나서 내 귓가로 올라온 것이 분명하다.
모기는 이제 가을에 몰려오는 현상이 되었다. 이러다 가을을 떠올리는 내 사랑하는 단어 목록에 이 녀석이 추가될까 두렵다.
사과, 떡, 단풍, 캠핑, 셔츠, 햇살, 산책, 재킷, 데님
... 모기.
느지막한 오전에 일어나 소리를 들으니 후드득, 챙쟁 -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거실로 나가 우드 블라인드를 사르륵 걷고 큰 창을 밀어 본다. 역시 비가 내리고 있다. 얼마 만에 오는 비더라, 잠시 방충망에 맺힌 물방울 너머를 흐리멍덩하니 쳐다본다.
분홍 장화를 신고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꼬마 아이와, 카키색 우산으로 비를 막으며 쫓아가는 젊은 엄마가 보인다. 슬쩍 웃는다.
비를 묘사하는 데에는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시청각적 표현이 여럿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을비에는 ‘추적추적’이 잘 어울린다. 추적추적, 어쩐지 사람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다. 물 자박한 아스팔트에, 신발 밑창이 천천히 잠겼다 떨어지는 소리.
얼마 전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님의 1995년 작품으로 <여수의 사랑>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왜 많은 장소 중에 ‘여수’를 골라 소설 속 배경으로 삼았냐는 질문에 작가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수가 아름다운 물(麗水)이라는 고장의 이름이 되기도 하고, 여행자의 우수(旅愁)라는 뜻의 여수가 되기도 하는 중의적인 느낌 때문에 여수를 택했습니다."
내게 누가 왜 가을비 소리를 ‘추적추적’이라 표현하냐고 물어보면 비슷한 대답을 해볼까.
“‘추적추적’은 젖은 땅과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이기도 하고, 가을의 자취(秋迹)라는 의미도 담겨있어요. 빗물을 자박하게 걷는 발자국(跡) 같기도 합니다. “
봄이 오는 소리는 아무래도 ‘벚꽃엔딩’이 차지한 것 같고, 앞으로 가을이 오는 소리는 추적추적으로 기록해 두자. 옥스퍼드 셔츠에 얇은 재킷 하나 걸치고서, 마구 세탁한 데님을 입고 버건디 더비를 신고. 발걸음 내딛을 때 바스락한 단풍 소리도 좋지만, 바지 밑단 좀 젖더라도 난 추적추적으로 정했다.
뭐가 됐든 가을이 오는 걸 모기 소리로 깨닫는 것보단 낫다. 까딱 잘못하면 위잉위잉이 될 뻔했는데, 적시에 내려준 가을비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