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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존재에 올라타 달린다는 발칙한 생각

나의 두 가지 버킷리스트, 오래오래 자전거 타기와 투르 드 프랑스

by STUDIO 명랑


1. 신적 존재에 올라타 달린다는 발칙한 생각


보라색 장갑판과 네온 그린 라인이 빛나는, 이질적이고 위압적인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사도를 향해 달려 나갑니다.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그 거대한 장갑판 아래에는, 리리스라는 ‘신적 존재’의 복제에서 태어난, 심장과 혈관과 근육을 가진 살아 있는 육체가 숨 쉬고 있습니다. 장갑은 그 신적 육체를 제어하고 감추기 위한 속박이자 보호막이며, 동시에 NERV가 붙잡아둔 신의 힘에 대한 굴레입니다.


초호기에 올라탄 주인공인 신지(碇いかり シンジ)는 엔트리 플러그 깊숙이 몸을 맡기고, 전신에 채워진 따뜻한 LCL(Life Creating Liquid)의 감각을 생생히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 액체는 폐를 통과해 호흡으로 스며들고, 세포 하나하나에 까지 젖어들어 초호기의 신경과 자신의 신경을 하나로 엮고 있습니다.


동기화율이 상승하자, 신지의 손끝과 발끝은 이미 금속 레버와 페달을 넘어, 초호기의 팔과 다리가 됩니다. 시야에 사도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이고, 관제실에서 긴박하게 울리는 경보음이 뇌를 울립니다. 그 순간, 전원 플러그가 사납게 뽑혀나가고, 계기판에 카운트다운이 붉게 점멸합니다—남은 시간은 단 몇 분.


그러나 초호기의 움직임은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거대한 발이 지면을 차는 순간, 대지와 공기가 동시에 뒤로 밀려나가고, 근육과 관절이 유기적으로 이어진 거인의 몸이 탄성을 터뜨립니다. 팔을 휘두르면 공기가 찢어지고, 그 울림이 신지의 팔꿈치와 어깨를 타고 전해지죠. [주 1]


그 질주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는 속도와 힘으로 곧바로 사도를 향합니다. 살아 있는 신의 육체를 조종하며, 신지는 마치 자신이 신과 가장 가까운 닮은 꼴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그 착각 속에서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이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자신은 그저 빌려 쓰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 몇 분의 전투는 더 치열하고, 더 뜨겁게 타오릅니다. 사도와의 거리가 사라지는 순간, 초호기는 이미 한계와 구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발칙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선은 언제나 인류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왔습니다. 이런 발칙한 생각은 인간의 경계를 건드리고, 익숙함을 의심하며,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신적 존재에 올라타 달린다는 발칙한 생각. 언젠가 인간은 누군가에게는 발칙한 생각이었던 인공지능을 실제로 구현해 냈듯, 이 발칙한 생각을 실제로 구현내 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적존재와는 별개로 이 순간의 감각, 신지가 생생히 느낀 그 감각은 실재합니다. 어쩌면 신의 형상과 가장 닮은 존재, 인간 — 그 육체의 한계를 밀어붙이며 달리는 순간, 우리는 그 감각을 오롯이 마주합니다.


사실 에바 초호기는 따로 근육을 위한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NERV의 정비·유지 시스템 덕분에 기계적으로 무시무시한 근육을 키우죠. 초호기의 생물학적 조직은 인공적으로 보충·재생되며, 상처 회복과 근육 유지 속도가 일반 생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릅니다. 이는 현실의 ‘손상-회복-초과회복’ 메커니즘과 닮았지만, 그 속도와 효율은 비약적으로 높게 설계된 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직 그런 축복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고통을 우회할 방법 없이, 끊임없는 통증과 싸우며 한계 끝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허벅지 근육을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렇게 쌓아 올린 힘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은 어쩌면 에바 초호기의 것보다 더 값진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것은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의지와 땀과 시간을 응축한 살아 있는 기념비이자,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증명하는 가장 찬란한 표식일 것입니다.



[1]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동기화율은 파일럿과 에바가 얼마나 일체화되어 움직일 수 있는지를 수치로 나타낸 지표입니다. 파일럿의 신경 신호와 에바의 신경 회로가 얼마나 정확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퍼센트로 표시하며, 수치가 높을수록 에바의 움직임이 파일럿의 의지·감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TV판 20화 〈마음의 형태, 사람의 모습 (心のかたち 人のかたち)〉에서 신지가 에바 초호기와 완전히 동기화되어 경계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참고)

동기화율은 단순한 조종 반응뿐 아니라 감각 공유에도 영향을 주어, 수치가 높아질수록 에바가 느끼는 시각·청각·촉각·통증 등이 파일럿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일반적으로 100%는 완전한 감각 공유 상태를 의미하며, 이 이상으로 상승하면 파일럿과 에바의 경계가 무너지고 폭주나 흡수 같은 특수 현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TV판 20화 〈마음의 형태, 사람의 모습 (心のかたち 人のかたち)〉에서 신지가 에바 초호기와 완전히 동기화되어 경계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제루엘과의 전투에서 초호기는 전원 케이블이 끊겨 5분 남짓의 내연 배터리로 싸우게 됩니다.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동기화율은 100%를 돌파하고, 초호기는 신지의 의지를 넘어선 폭주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때 초호기는 스스로 사도를 잔혹하게 분해·포식하고, S²기관을 흡수해 무한 동력을 얻게 됩니다.


전투가 끝난 뒤 신지의 육체는 초호기 내부에서 사라지고, 의식은 LCL 공간에 흡수되어 현실과는 다른 의식 세계에서 어머니 유이와 대면합니다. 30일 후 초호기 안에서 신지의 육체가 재구성되어 귀환하며, 이때 기록된 동기화율은 400%에 달했습니다. 이 회차는 동기화율이 높아질수록 파일럿과 에바의 감각·의지가 완전히 일체화되고, 100%를 넘어서면 물리적·정신적 경계가 무너진다는 설정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 (참고) 본 스케치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 Neon Genesis Evangelion)』 의 한 장면을 참고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원작자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및 저작권자 스튜디오 카라(Studio Khara), 가이낙스(GAINAX)에 사전 허락을 받지 않은 참고용 창작물이며, 상업적 목적이 아닌 글의 서사적 맥락 속에서 ‘인간과 기계, 감정과 구원의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보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원 저작물의 모든 권리는 원작자 및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2. 사실 로드 자전거는 매우 불편합니다


1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수백만 원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초경량 카본 프레임과 최첨단 무선 구동계를 장착하며, 공기역학적 휠셋까지 집요하게 바꾸지만—사실 로드 자전거는 매우 불편합니다. 로드 자전거의 지오메트리는 라이더를 불편하게 몰아붙입니다. 속도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탑튜브를 길게, 헤드튜브를 짧게 설계해 상체를 낮추고, 안장 위치를 페달축 뒤로 깊숙이 밀어 넣어 강한 하중을 다리에 집중시키게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상체를 깊게 숙이게 하여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의 리듬에 몰입하게 합니다. 이 순간 모든 불편함은, 이상하게도 몰입을 위한 의식으로 변해갑니다. 허리를 짓누르는 압박, 손바닥을 타고 오르는 저릿함, 안장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압력마저도 점점 하나의 리듬에 녹아듭니다. 숨과 심장 박동, 페달링이 맞물리며 세상은 점점 멀어지고, 오직 나와 도로, 그리고 바람만이 남습니다. 불편함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각들이 속도를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하고, 순간을 깊이 붙잡도록 유혹합니다. [주 2]


이런 감각은 어쩌면, 신의 육체를 타고 있는 에바 초호기의 신지는 끝내 온전히 느끼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짐을 짊어진 채 사도와 맞서 싸우지만, 결국 거대한 기체를 조종할 뿐입니다. 초호기의 팔과 다리를 자기 것처럼 움직이지만, 그 힘은 그의 근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숨이 차오르는 것도, 땀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전장을 누비지만, 그 감각은 어디까지나 매개된 신경 신호와 기계적 반응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독특하면서 생생한 감각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온갖 기계적 장치와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뜨겁게 만드는 투르 드 프랑스의 그 서사—수천 시간의 훈련과 철저한 준비 끝에 출전한 선수가, 피로와 고통 속에서도 몰입을 통해 얻은 환희가 한 몸이 되는 순간 느끼는 그 감각, 바로 그 감각.


이 감각은 로드 자전거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로드 자전거에 몰입해서 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의 낭만도 럭셔리 스포츠카의 심장을 울리는 배기음도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는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한 선수는 아니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고, 계절의 변화를 가로지르며 자신에게 깊이 몰입하는, 그 감각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한강의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으며 달리고 있습니다.



[2] 몰입은 주어진 활동에 정신적·신체적 자원을 온전히 쏟아붓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이 순간에는 불필요한 생각이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고, 자의식은 희미해지지만 자신감은 오히려 한층 깊어진 상태가 됩니다. 시간 감각이 왜곡되어 긴 시간이 짧게 느껴지고, 행위 자체에서 깊은 만족과 가치를 발견하게 되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이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자의식은 사라지지만 자신감은 평소보다 커진다. 시간 감각에도 변화가 온다. 한 시간이 1분처럼 금방 흘러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암벽을 타는 산악인이 고난도의 동작을 하면서 짬을 내어 행복감에 젖는다면 추락할지도 모른다. 까다로운 수술을 하는 외과의나 고난도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행복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몰입하지 않고도 행복을 맛볼 수는 있다.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의 편안함과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소중한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유형의 행복감은 형편이 안 좋아지면 눈 녹듯 사라지기에 외부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몰입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저, 해냄출판사, 2021년 5월 5일 출간>





3. 나의 두 가지 버킷리스트, '오래오래 자전거 타기'와 '투르 드 프랑스 투어'


자전거 투어를 다니다 보면 뜻밖의 장면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오래되어 보이는 자전거에 올라타 천천히 페달을 밟는 듯한 할아버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와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과 노는 법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의 뒷모습은 힘들이는 기색 하나 없이도 일정한 속도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에는 지오메트리도 없고, 성능을 논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철제 프레임과 묵직한 바퀴가 전부일뿐인데, 속도는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무아의 경지라고 해야 할까요? 할아버지의 표정은 파도 한 점 없는 호수처럼 평온하기만 하고, 그 시선은 바람과 강물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석양이 강물 위로 번져드는 풍경 속에서 그 뒷모습은 더욱 깊은 인상으로 남습니다.


누군가 내게 미래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대답하고 싶습니다. 석양이 물드는 순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손에 익숙한 자전거를 타고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강둑 위를 달리고 싶다고.


또 한 가지 버킷리스트가 사실 더 있습니다. 그것은 '투르 드 프랑스' 자전거 투어. 투어 구상은 대략 이렇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 조직위원회는 9개월 전인 10월말에서 11월초 정도에 다음 해 7월에 21일간 치러질 코스를 발표합니다. 2025년도의 모든 일정은 프랑스국경을 넘지않고 프랑스내에서 진행된다고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21일간의 살인적인 일정은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아무리 준비해도 이 일정으로 따라갈 순 없겠죠.


"투르 드 프랑스 조직위원회(A.S.O.)가 2024년 10월 29일 프프랑스 파리의 팔레 데 콩그레에서 내년 7월에 개최되는 제112회 투르 드 프랑스 코스를 발표했습니다."

프랑스는 90일 관광으로 체류가 가능하다고 하니 투르 드 프랑스가 시작되기 60일 전에 조직위원회가 발표한 코스를 먼저 따라가는 겁니다. 거리를 쪼개고 휴식 시간을 넣어서. 그리고 5일 정도는 투르 드 프랑스 일정과 겹치게 하고 선수들을 따라가 실제 경기 관람도 하면서 선수들의 모습을 나와 오버랩시켜보는 거죠. 그리고 나머지 30일 정도 남은 나머지 코스를 다시 따라가며 완주하는 겁니다.


투어도 하고 프랑스 곳곳을 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스태프도 없이 여행 짐도 직접 싸들고 투어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낭만과 의미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전 세계 많은 아마추어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투르 드 프랑스 코스를 일주하고 있습니다. 각자 준비한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투어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이 책에 빠져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French Revolutions: Cycling the Tour de France』. 저자인 팀 무어(Tim Moore)는 ‘운동 부족한 중년 남성’으로서, 투르 드 프랑스 코스를 프로선수들이 경주하기 몇 주 전 자전거로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생말로(St. Malo)에서 출발해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총 약 3,630 km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프랑스 시골 풍경의 변화, 지역 주민들의 반응 등이 생생하게 담긴 문화 감상도 있어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 3]



[3]『French Revolutions: Cycling the Tour de France(2001)』.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본이 발간되지 않았습니다. 팀 무어(Tim Moore)의 『French Revolutions』는 투르 드 프랑스를 ‘따라 달린’ 한 아마추어의 무모한 여정을 유쾌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그는 운동 부족의 중년으로, 전문 훈련이나 고급 장비 없이 투르 드 프랑스의 3,600km 코스를 스스로 완주하겠다는 발칙한 도전을 감행합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투르 드 프랑스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대신 삐딱한 각도에서 바라본 서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프로 선수들의 초인적 훈련과 극적인 승부가 아니라, 낡은 장비와 허약한 몸,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 앞에서 신음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아이러니가 투르 드 프랑스를 더욱 빛나게 만듭니다. ‘인간의 한계’라는 거대한 신화를, 우리의 일상적 몸과 감각으로 다시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어(Moore)는 여정 곳곳에서 프랑스 시골 풍경, 알프스의 장엄한 오르막, 그리고 도로 옆에서 구경하는 현지인들의 시선을 포착합니다. 이 문화적 디테일은 자전거 여행기를 넘어 프랑스를 관통하는 문화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의 문장은 때로는 냉소적이고, 때로는 시적이며, 그 안에서 로드 자전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유머,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얻어지는 기묘한 환희를 드러내는 매개체가 됩니다.





4. 당신의 오늘도 무사히 가볍게 굴러가길


자, 이제 『발칙한 로드 자전거 바이블』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이 길었던 여정의 페달을 잠시 멈춥니다. 처음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저는 제법 사적인 이야기로 문을 열었습니다. 남산 언덕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던 기억—땀방울이 뒷목을 타고 흘러내려 등줄기를 적시는 순간, 클릿이 딸깍 하고 채워지며 ‘이제 부터 시작이다’ 하고 외치던 그 소리. 그 모든 것이 어설펐지만 동시에 짜릿했습니다. 처음 입었던 빕숏은 솔직히 난감한 옷이었습니다. 몸을 낯설게 조여오고 거울 속 내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막상 안장에 앉는 순간 그 불편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유롭고 단단하게 감싸주는 새로운 감각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일상에서 벗어나 진짜 라이더로 거듭나는 작은 통과의례 같았지요. 그리고 알루미늄의 투박하지만 정직한 울림과 카본의 날렵하고도 가벼운 매혹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시간들.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은 단순한 장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라이더이고 싶은지’ ‘무엇을 갈망하는 사람인지’를 더 깊이 묻는 질문이었고,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저는 조금 더 제 자신을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로드 자전거는 페달을 처음 밟는 순간부터, 마침내 자전거를 멈추고 클릿을 빼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가장 생생하고 역동적인 감각을 선사합니다. 바람을 가르며, 우리는 달리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다독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 책을 통해 로드 자전거의 ‘발칙한’ 애정 고백과 함께 기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고, 프레임과 구동계, 타이어 하나에 깃든 기술과 열정, 그 너머의 선택과 감각, 몰입을 위한 설계까지—그 본질을 더듬는 동안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시선으로 로드 자전거를 다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로드 자전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나의 욕망을 비추며, 마침내 나 자신과 가장 정직하게 대면하게 만드는 '움직이는 거울'이었습니다. 우리는 카본의 가벼움, 전자식 구동의 정밀함을 갈망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페달을 밟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존재’, 바로 ‘나’의 가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했던 가장 발칙한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같은 길을 달리게 될 당신께 이 책이 꽤나 성가시지만 유익한 동행이자, 길 위에서 건네는 조용한 응원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혹여 페달을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이 그 출발선에서 등을 살짝 밀어주는 작은 안내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바람을 가르며 “아, 이게 바로 그 말하던 '묵직한 희열'의 순간이구나” 하고 미소 짓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긴 여정은 충분히 보람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로드 자전거 라이딩이 저에게 남겨준 건 거창한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번쯤은 다 겪어봤을 그 순간들—숨이 차서 페달을 멈추고 싶던 고비, 안장에서 내려앉고 싶을 만큼 힘들다가도 다시 올라서던 고집, 예기치 않게 찾아온 펑크 앞에서 허둥대던 기억,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출발했던 발걸음들. 그 반복 속에서 몸은 조금씩 강해졌고,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렇게 쌓여온 것이 바로 언덕에서 버틴 바퀴 수만큼의 성장의 훈장이었고, 길 위에서 혼잣말처럼 이어간 길과의 대화였습니다. 언젠가는 피곤함 속에서도 이상하게 가슴 깊이 차오르던 묵직한 희열이 있었고, 또 어떤 날에는 바람, 노면, 기계, 그리고 제 몸까지 모든 게 하나로 맞아떨어지며 경험했던 완벽한 몰입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저의 일기장 속에 차곡차곡 살아남았습니다. 그 기록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저를 불러 세웠고, 결국 이 책을 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은 거창한 해설서라기보다, 그저 라이더 한 사람이 길 위에서 남긴 작은 발자취의 모음입니다. 다만 그 발자취 속에 단순한 경험만이 아니라, 프레임과 구동계, 타이어 하나하나에 스며든 기술과 열정, 그리고 그 너머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과 감각,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함께 녹여 내고자 했습니다.

이 길 위에서 보이지 않는 동료가 되어준 독자 여러분의 응원이 없었다면, 저는 이 가파른 언덕을 끝내 넘지 못했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 글 쓰는 시간이 늘면서 페달 위 시간은 줄었습니다. 이제는 동네 라이딩 코스부터 천천히 몸을 깨우며 다시 시작해 보려 합니다. 언젠가 ‘발칙한 투르 드 프랑스 로드 투어’로, 이 근처 어딘가에서 여러분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날까지, 바람 속에서 안부 전합니다 — 당신의 오늘도 무사히 가볍게 굴러가길.."



언젠가 같은 길을 달리게 될 당신께 이 책이 꽤나 성가시지만 유익한 동행이자, 길 위에서 건네는 조용한 응원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혹여 페달을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이 그 출발선에서 등을 살짝 밀어주는 작은 안내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바람을 가르며 “아, 이게 바로 그 말하던 '묵직한 희열'의 순간이구나” 하고 미소 짓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긴 여정은 충분히 보람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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