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상해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을 사랑상해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무단으로 타인의 마음을 약탈하고,
타인의 감정을 폭력으로 억압해
깊은 상처를 입혔기에
러브플래닛 사랑상해죄로 긴급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발언을 안 할 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지만
변호인이 대신 발언할 경우 가중처벌 될 수 있습니다.
THE LOVE PLANET 사랑학 13장 _ 사랑상해죄 미란다 원칙
♥♥♥
형사팀장 유진은 자동차 사고로 죽은 남자의 집을 방문하러 가고 있었다. 가는 중에 유진은 자택에서의 일이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두 여자를 죽게 한 살인자예요.’
그는 두 번째 부인, 글로리아의 말에 반박할 뜻이 없었다. 그는 이 행성에 와서 두 여자를 죽였다. 그러고도 버젓이 살고 있다. 행성인 모두가 사랑을 첫 계명으로 실천할 때, 그는 반대를 꿈꿔왔다. 그에게 이 행성은 결코 사랑행성이 아니었다. 사랑과 멀어지기 위해 늘 사랑과 가장 먼 거리로 뛰었다. 그것은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는 것. 사랑과 일이 공존하지 않는 자였다. 워커홀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자유로웠다. 그래 자유. 혼자 살아가는 자유. 이 행성을 떠날 수 없는 그가 원하는 단 한 가지였다. 그는 사랑 따윈 저 먼 우주 밖으로 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십 년도 지난 중고 드론카에서 흘러나온 남성의 음성이 유진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죽은 남자의 집은 도시 중심부에서 변두리에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 방문은 결국 신참 제니와 함께 했다. 제니가 그때 러브시티 외곽에 있는 주소를 보고 물었다.
“변두리 집은 이전 부부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유진이 반문했다.
"7년이란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보낸 사람들이 높은 행복 점수에 의해 당연히 러브시티 중심가에 주택을 배정받으니까요, 아무래도 시내 외곽은..."
"형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단선적 시각 아닌가? 세상 모든 것은 복선적인데 말이야. 범죄도 마찬가지고."
"처음 선은 단선을 긋고 시작하죠. 처음부터 이선 저선 다 긋고 시작하면 복잡해서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단순한 인간이라 그게..."
“자네는 일도 지지 않는 성격인가?"
"아니, 여기에 왜 성격을 붙입니까?"
"허 참." 유진은 짧게 혀를 찼다.
그때 마침 사망자의 주택단지에 도착했다. 러브플래닛만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멋들어진 풍광 속에 단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이 답답한 제니의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이 정도로 잘 가꿔진 단지일지 제니는 몰랐다. 행성 행복점수가 높더라도 이곳을 선택할 수 있는 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이 약간 민망해졌다.
"뭐, 형사라면 복선적으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제니가 얼버무리리 듯 이야기했다. 유진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형사팀장과 신입은 사망자의 전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말수가 없는 조용한 여자였다.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얼굴에 대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여자의 강단 내지는 결기가 전해져 왔다. 그녀에게 저간의 상황을 물었다. 아무래도 여자인 신참 제니가 전담했다.
“충격이 크시겠어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저는 러브플래닛 예비 후보자였어요. 전 남편과 결혼한 여자분이... 알지 못하는 행성병으로 저 세상으로... 그래서 중행복기 마지막쯤... 후보로 대기 중에 운 좋게 뽑혀 왔어요.”
“결혼생활은 어떠셨나요?” 제니의 물음에 답이 없었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너무 짧아서... 특별히...”
“남편이 프로그램 툴을 잘 다루나요?”
“아뇨, 복잡한 계산은 질색하곤 했어요.”
“전 남편이 혹 근무지가 아닌 다른 곳에 다니거나 모르는 곳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나요?”
“아뇨.” 그녀는 계속 아뇨 만을 되풀이했다.
“혹시, 전 남편이 평소 이상한 약을 하거나 하진 않았나요?”
"모르겠어요." 그때서야 다른 대답이 나왔다.
“전 남편 몸에서 마약성분이 검출되어서요. 혹시 부인 머리카락 한 올만 채취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제니가 마약성분 검사를 위해 전 부인의 머리카락을 뽑아 특수가방에 담자, 팀장 유진이 그쯤 하면 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첫 방문을 마치고 둘은 나왔었다.
두 번째 방문인 지금은 팀장 유진 단독이었다. 수사 2팀 세 사람에게 특별휴가를 주었다. 사랑에 심각한 두 남자와 이 행성에서 첫사랑에 빠져야 하는 한 여자가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그리고 행성 결혼축제에 무심한 그는 혼자서 비상근무라는 형식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사망사건의 남자 집 앞에 들어서며 유진은 자신의 러브워치를 묵음 처리했다. 수사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유진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상대를 확인한 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햇병아리 신입인 제니가 이번에도 팀장의 명을 어기고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어이없어하는 유진 앞에서 그녀는 당당히 러브워치를 묵음 처리하였다. 혼을 내려던 팀장은 됐다 하며 사망한 남자의 집에 들어섰다.
시간은 오후 4시 반 정도 되었다.
이전과 같이 전처가 응대해 주었다.
팀장 유진이 말했다.
“부인의 머리카락 검사에선 아무 이상한 성분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진은 전처에게 부인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살 난 차량의 깨어진 블랙박스에서 남편의 음성이 복원되었습니다. 왜, 그러셨죠?”
부인은 대답이 없었다.
“부인의 남편은 그날 자신이 평소 하는 용량보다 많은 양의 약을 흡입하고 차에 올랐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저도 이곳에 행복하기 위해 왔어요... 그런데 시기가 안 좋았죠. 중행복기도 다 지나가는 시점에 왔으니까요. 그 남자는 자식을 원했어요. 결혼기간이 소행복기 밖에 얼마 안 남았는데도. 처음엔 제게 살뜰하게 대해줬죠. 자식을 낳아 최고 포인트와 인센티브를 얻어, 다음 결혼 때 도시 중심부로 옮기고 싶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임신이 되지 않았어요. 그 남잔 초조해하더니 태도가 돌변했어요. 저를 폭행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미친!”
제니가 화를 참지 못하자 그녀가 말을 멈췄다.
“왜, 신고하지 않았나요?”
제니가 톤을 높여 물었다.
“러브워치가 작동했을 텐데요?”
제니가 재차 물었다.
“그가 러브워치를 풀었어요.”
전 부인이 답했다.
“러브워치는 자기 지문이 닿아야만 풀 수 있잖아요?”
“그가 강제로 제 손을 잡아 러브워치에 갖다 댔어요.”
“마지막, 결혼상대에 대한 상대평가 때도 기회는 있었잖아요?”
“만약, 제가 이 일로 문제가 생겨 혹시 이 행성에서 살아남지 못할까 두려웠어요. 전, 정식이 아니라 대타였으니까요.”
그녀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며, 악몽 같은 결혼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행복을 위해 만든 행성이 어떤 이에겐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었다.
러브플래닛 ‘부작용’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모든 제도는 불완전성을 가진다.
사랑행성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에리히 박사도 부작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자료를 취합하고 있었다. 행성폴리스 몇몇 간부들에게 부작용 발견 즉시 보고서를 작성해 알리도록 했다. 다만 이것이 지구행성연합에 알려지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 부작용 보고서가 드러날 경우, 러브플래닛의 현 제도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되고, 세상에 알려짐으로 인해 이어질 후폭풍을 더 염려했다. 언젠가 알려지더라도 박사는 그 기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려 했다.
전처는 말을 계속해 갔다.
“저도 다음번에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참았어요. 근데, 이혼식 후에도 그의 폭행이 멈추지 않았어요. 같은 공간에 사니까."
제니가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그가 그러더라고요. 헤어지니 그렇게 좋아? 딴 남자 만날 생각 하니까 설레고 죽겠지?라는 거예요.”
그 말이 유진의 뇌를 강하게 쳤다. 그의 전처인 글로리아도 똑같이 한 말이었다.
“아니요, 전 전혀 설레지 않아요.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단 생각 말고 없어요.”
그녀는 부푼 희망이 빠진 풍선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날도 저를 폭행했죠. 눈에 띄지 않는 곳만 골라서요. 이런 악마가 다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꼴이 보기 싫었어요. 아니, 이런 악마가 혹시 나와 같이 말 못 하는 다른 여자를 나처럼 폭행하면 어쩌나 그 여자의 인생은... 얼마나 불행하고 처참할까. 나와 같아선 안 되는데 그래서 그랬어요."
"이 우주에서 나쁜 인간들을 어떻게 골라낼 수 있을까요?"
제니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신도 못 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그래서 신은 결국 죽을 때 인간을 선별하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으로."
팀장 유진이 답했다.
"그때, 사랑학 13장과 그 해설서가 떠오르더군요. 당신을 사랑상해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무단으로 타인의 마음을 약탈하고, 타인의 감정을 폭력으로 억압해 깊은 상처를 입혔기에 러브플래닛 사랑죄로 긴급체포합니다."
사랑에 재판관은 없다.
애인이라는 이유로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 누구도 상대에게 재판 봉을 두드릴 자격은 없다.
철장 속에 갇혀야 할 건,
사랑이라 쓰인 법복을 입고
제멋대로 재판 봉을 들고 상대를 구속하려는
그 생각, 그 마음이다.
THE LOVE PLANET 사랑학 13장 해설서 _ 그릇된 사랑에 대한 재판
“사랑학이 있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예요. 안 그런가요?"
제니와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전 부인이 물었다.
"배우는 사람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게 어떻게 공부가 되겠어요?”
그녀가 다시 한번 그들에게 물었다.
“그 약은 어디서 났죠?” 대답 대신 유진이 씁쓸하게 화제를 돌렸다.
“... 가끔 그가 집에서 먹던 약이에요. 혼자서 취하고 즐기기 위해. 그날... 전보다 많은 약을 탔죠. 근데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다며 차를 몰고 나갔어요. 그게 다예요.”
“혹시, 그 약을 어디서 구입하는지 아세요?”
“그 약을 구입할 때, 왕... 아, 왕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것 말고는 몰라요.”
유진은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왕이? 이 행성에 약팔이가 있다는 말인가? 그날의 목적지를 추측건대 사망자는 약팔이와 접선하러 간 게 분명했다. 그게 분명해진다면 이제 이곳도 청정행성이 아니라는 말인가? 한 번 약이 반입되면 어느 행성이고 오염되지 않는 행성이 없었다.
그녀가 뜬금없이 현재 시각을 말했다.
“지금, 시간이 5시 55분이거든요.”
“네, 그런데요?” 제니가 물었다.
“모르세요? 첫인상 선택 마감시간!”
그녀의 대답에 제니가 아뿔싸 했다. 오늘이 이 행성의 데이트 상대 첫인상 선택 마지막 날이었다.
“5분밖에 안 남았어요. 전 이만, 선택해야 해서요.”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제니는 러브워치의 묵음 모드를 풀었다. 그녀의 러브워치에 알림음이 끊이지 않았다. 첫인상으로 제니를 선택한 행성 남자들의 알람이 계속해 반복적으로 울렸다.
유진이 전부인을 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알겠습니다. 발단은 그날도 남편이 약을 하고 차를 운행한 거군요.”
그리고 신입형사 제니에게 한마디 하고 나갔다.
“난, 먼저 가네.”
“아! 팀장님! 그러고 가면...”
유진은 피의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체포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제니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를 체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첫인상 선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쉼 없이 러브워치로 오는 상대 중에 선택할 것인가? 제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제니도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팀장의 드론카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띵동!”
-제니 님께서 유진 님을 첫인상 선택하셨습니다.
회사로 복귀하는 유진의 러브워치로 알림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