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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kim Dec 31. 2023

혁신에 있어 경계해야할 것

전통의 계승의 다른 이름 - 도그마

혁신 학교에 수년을 있으며 '혁신'하지 못해 불편했던 경험이 있다.


혁신교육이나 혁신학교라는 그 이름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미래교육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20년이 된 혁신교육이라는 하나의 사조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조나 운동(movement) 측면에서의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너무 깊은 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리 깊은 철학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학교, 혹은 사회의 모든 다양한 조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내가 아쉬움과 불편함을 느꼈던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옳다는 어조도 아니다. 한번은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나 역시도 언제든 그런 우를 범할 수 있기에 그런 것들을 경계하고자 쓰는 글이다.


우리 학교는 전통의 계승과 동시에 혁신을 지향한다. 학교의 철학(why)은 꾸준하게 계승되어야 하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 (how)은 그 시점의 구성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조정되고 '혁신'되어야 함이 옳다. (현재의 상황에서도 이미 완벽하다면 그대로 실행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건 그 방법을 실제로 실현하는 구성원들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것을 계승하면서 현 세대의 구성원이 그 '방법'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답습'에 그칠 수 있다. 그것을 실제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구성원이 납득하지 못한채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실제적' (authentic)일 수 없다. 그것은 참 삶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철학은 계승하되 방법은 혁신해야 하는 것이다. 학교라는 조직을 둘러싼 시대와 환경은 지속적으로 변하며, 구성원도 변한다.


우리 학교에서 교육을 실현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다. 전통과 철학을 계승하면서 그것의 바탕 위에 나의 색깔이 스며든 교육적인 방법을 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의 철학과 너무 달라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들이 현 구성원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납득하지 못해서도 안된다. 철학을 구체화하는 방법은 학급 운영이나 교육과정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많이 달라지지는 않으나 조금씩의 변동과 혁신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 때로는 커다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할 수도 있다. 우리의 철학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지금의 방법이 옳지 않다면, 혹은 시대나 구성원과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방법을 추가하거나 시도하여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그것은 철학에 대한 것은 아니다. 방법에 대한 것이다.  학교의 근간이 되는 철학은 바뀌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그 철학을 보고 모인 사람들로 구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철학에 공감한 구성원들로 모여 있기에 그 철학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내가 우리 학교를 지키는 철학은 이것들이었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아쉽게도, 일부 구성원들에게서 과거의 전통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모습이나 전통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모습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종의 '도그마'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 더 이상의 혁신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조직은 정체되게 된다. 단순히 계승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혁신'할 수 없다. 현 세대의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우리 것을 깊이있게 들여다봐야 한다. 과거의 선조들이 탄탄하게 세워 놓은 철학을 지금의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내면화하고 동시에 방법적인 부분에서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는지 전방위적으로 고민하며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일정 기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 때의 분위기는 '긴 시간 이어온 전통은 무조건 옳은 것이기에 굳이 되묻거나 살펴볼 필요가 없다는'식의 무비판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그 때문에 오히려 전통과 철학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무조건 받아들여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는 식의 뉘앙스가 동반됐다. '나는 이미 충분히 깊이 있게 들여다봤으니 내가 말하는 것이 옳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너의 의견은 틀렸거나 혹은 너가 깊이 있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는 이야기에선 도그마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게 최선일까?'라는 나의 물음은 단단한 철학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으로 여겨지게 된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철학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방법에 대한 의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구성원에겐 그것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철학을 내면화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한 상태로 실행하는 구성원들의 교육은 빛을 잃게 된다. 이것이 정말 내것인지? 나는 조직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철학을 계승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철학도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봐야 한다.


겉으로 봤을 때 행위나 결과는 달라지는 것이 없으나,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교사의 마음가짐이 다르게 된다. 이것이 옳은지, 이 방법이 최선인지를 매번 되돌아보고 깊이 있게 살피는 것은 지리하고 힘이 들고 비효율적인 행위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을 거쳐 내것으로 만든 전통은 진심으로 내것이 되어 빛을 내게 된다. 같은 일을 하게 되더라도 진정 내것이 되어 충만한 마음으로 그것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일정 기간 바이블을 되묻거나 의문을 품는 것 자체도 죄시 되었던 시기에 나는 심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다. 철학은 이미 내면화한 후였으나 방법에 대해서는 학생들을 위해 철학을 실현하는 더 최선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일부 구성원으로 인해 그것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조직에 대한 의욕을 잃을 수 밖에는 없었다.


'혁신'을 원한다면, 그리고 더 나은 교육을 원한다면. 끊임없이 돌아보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수 년간 최선의 방안을 찾아서 운영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또 다를 수가 있다. 그렇기에 새롭게 봐야 하고 다시 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나 '돌아보기'에 정성을 쏟는 이유다. 더 나은 미래의 우리를 위해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교육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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