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참 멋진 말입니다. 적절한 시기에 한 방을 갖추고 나온 혁신적 아이템은 작게는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때로는 세계사의 흐름을 뒤집기도 합니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디지털카메라는 카메라 업계의 절대강자 코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습니다. 1940년대 연합군이 개발한 레이더는 독일군의 잠수함과 전투기를 물리치며 2차 대전의 판도를 뒤집었습니다. 짜릿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이 아이디어들이 상용화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완제품의 씨앗이 될 아이디어들은 다들 10여 년 동안 미친 사람(loon)이나 떠올릴 실용성 없는 생각이라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뿐이었죠. 이들이 한 방(shot)을 갖추고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말입니다.
모든 일이 역사가 된 다음 한 마디 얹기는 쉽습니다. 조직이 경직되어서 혁신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구성원 모두 자리보전과 사내정치에 골몰해서 생긴 일이라고요. 어떤 이들은 이런 혁신을 터뜨려서 업계 최강자가 된 기업은 결국 혁신성을 잃고 굳어가다가 다음 세대의 기업이 터뜨린 혁신에 무릎 꿇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다윗은 골리앗이 되어 결국 다음 다윗에게 패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이클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혁신을 계속 이어가는 조직은 정말로 불가능한 걸까요? 우리 회사, 우리 연구소가 끝없는 혁신을 이어가며 오래도록 업계에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조직을 바꿔야 하는 걸까요? <룬샷>은 이 질문에 답하는 책입니다.
저자 샤피 바칼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박사를 받은 수재인데, 지금은 학계를 떠났고 바이오 벤처기업을 여러 차례 성공시킨 기술벤처 경영인입니다. 물론 이쪽 업계가 으레 그렇듯 대차게 실패한 경험도 있고요. 물리학자 출신 경영인이라는 배경 덕에 이 책은 경영서 치고는 좀 특이하게 쓰여 있는데, 통계물리학의 상전이(phase transition) 현상에 빗대어 뻣뻣하게 경직된 조직과 아이디어는 많지만 실현은 못 하는 조직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혁신을 이어가며 살아남는 조직을 만들어내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저자는 우선 중간 규모 이상의 조직이 운영하는 프로젝트를 ‘프랜차이즈’와 ‘룬샷’으로 구분합니다. 프랜차이즈는 이전에 성공한 적 있는 아이템의 속편입니다. 업계를 뒤흔드는 혁신은 아니지만 안정적으로 수입을 내는 캐시카우이고, 지루하고 게으르다고 평단의 욕은 먹어도 관객은 많이 동원하는 시리즈물 영화입니다. 룬샷은 성공한다면 판도를 뒤바꾸는 대박 아이템이지만 언뜻 봐도 허점투성이인 데다 성공할 확률은 엄청나게 낮습니다. 이상적인 조직이라면 안정적으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가운데 룬샷을 놓치지 않고 한 건씩 터뜨려 줘야겠지요?
이어서 저자는, 조직의 두 가지 ‘상태’를 정의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병사’입니다. 이들은 안정적으로 프랜차이즈 프로젝트를 굴리는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평상시에 돈을 실제로 벌어오는 사람들이지만, 이 팀에서 갑자기 판도를 뒤바꾸는 혁신이 생겨나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술가’입니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는 돈 되는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이상한 아이디어나 내세우고 쓸모없어 보이는 시제품이나 만드는데, 이런 아이템이 아주 낮은 확률로 게임 체인저가 됩니다. 보통 스타트업 사람들이 꿈꾸는 결말이겠지요.
스타트업은 조직이 작은 데다 자금은 외부 투자로 조달할 테니 모두가 예술가 노릇을 해도 괜찮고 또 그래야 마땅하지만, 대기업 같은 큰 조직에서는 병사와 예술가들이 반목하기 쉽습니다. 회사를 다녀 본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하실 텐데요, 사업부와 연구소 사람들이 사이가 좋기는 쉽지 않지요? 사업부 사람들은 연구원들이 월급은 자기들만큼, 또는 박사랍시고 더 많이 받아가면서 실제로 돈 되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월급 루팡’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창조적 작업이야말로 미래 먹거리인데 사업부 일개미들이 그걸 몰라준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건강한 조직은 병사들이 안정적으로 프랜차이즈 프로젝트를 굴리는 와중에 예술가들이 한 방씩 터뜨리면서 시장 지배력을 놓치지 않는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개의 원칙을 제안합니다. 첫째 원칙은 상분리입니다. 얼음과 물을 억지로 깨서 섞으면 처음에는 슬러시가 된 것 같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같이 얼어붙어서 얼음덩어리가 되거나 녹아서 물이 됩니다. 프랜차이즈 상태와 룬샷은 딱 붙어서 공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프랜차이즈와 룬샷은 작동 원리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한 개의 팀이 프랜차이즈와 룬샷을 둘 다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조직 내에 프랜차이즈 전담 부서와 룬샷 전담 부서는 분리되어서 각자 할 일을 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조직 간의 반목만 커지고 결국 따로 놀게 되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서 저자가 강조하는 두 번째 원칙은 동적 평형입니다. 조직 내에 프랜차이즈와 룬샷 팀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활발히 상호작용을 하는 상태여야 한다는 거지요. 물리학을 공부해 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시겠지만, 흥미로운 현상은 항상 경계선에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물과 얼음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너무 추워도 안 되고 너무 더워도 안 되겠지요? 바꾸어 말해서, 조직이 지나치게 병사들의 프랜차이즈 프로젝트를 선호하면 예술가들은 적응을 못 하고 적성에도 안 맞는 병사 노릇을 하거나 이직할 겁니다. 이런 조직에서 룬샷을 터뜨리기는 어렵겠죠? 반대로 창조적 프로젝트만 장려하고 당장 돈을 벌어다 주는 프랜차이즈 팀원들을 홀대한다면 십중팔구는 지리멸렬하게 실패만 반복하다가 자금줄이 말라서 무너질 겁니다.
물과 얼음이 접한 경계면에서는 일부 물 분자가 얼어붙기도 하고 얼음 분자 일부가 풀려나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동적 평형 현상이 진행됩니다. 이처럼 프랜차이즈와 룬샷 부서 간에 끊임없는 교류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두 조직 모두의 논리에 정통한 조율 담당자가 하나 있어서 두 조직이 서로 상대방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마지막 원칙은 임계 질량입니다. 원자폭탄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폭발하려면 임계질량을 넘어서는 방사성 물질이 모여 있어야 하는 것처럼, 룬샷이 제대로 된 아이템이 되어 꽃을 피우려면 그 조직과 프로젝트의 개수가 일정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룬샷 프로젝트 하나를 굴리는 데 1년의 시간이 걸리고, 성공할 확률은 10%라고 단순히 생각해 봅시다. 룬샷 프로젝트가 적어도 해마다 한 개는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으로, 90% 이상의 확률로 적어도 한 개의 프로젝트가 성공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이러면 적어도 22개의 프로젝트를 병렬로 굴려야 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지요? 이만큼의 투자는 해 줘야 룬샷의 성공이 연쇄반응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겁니다. 어정쩡하게 룬샷 프로젝트 한 개만 간신히 굴리고 있다면 10년에 한 번 터질까 말까 할 텐데, 이러면 십중팔구 성과가 나오기 전에 담당자가 잘릴 겁니다.
이와 같은 큰 흐름 외에도, <룬샷>에는 전략형/제품형 룬샷의 구분, ‘모세형 함정’ 피하기, 시스템 사고의 도입, 중간관리자 인센티브 개선 등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5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짧은 글로 요약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으니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빌 게이츠도 이 책을 “내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는 책”이라고 극찬했다고 하지요. 자기 분야에서 혁신을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의미 있는 일을 벌여 나가도록 돕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책 한 권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