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거실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공간이었다. 아니 거실뿐 아니라 집 안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엄마는 온종일 집 안을 돌아다니며 치우고 털고 쓸고 닦으셨다.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치 그렇게 끊임없이 청소를 하지 않으면 주부의 자격이 없어진다는 듯이.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집에 있을 권리가 생긴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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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의 결여—'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 줄 제삼자를 찾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람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 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pp. 20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