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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원 Feb 04. 2021

인간은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 <사람, 장소, 환대>

최근에 논산 육군훈련소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대체복무를 하는 중이고, 비록 직접적으로 군 복무를 하지는 않아도 기초 군사훈련 4주는 받아야 했거든요. 태어나서 처음이자 (바라건대) 마지막으로 군부대에서 먹고 자면서 훈련을 받았는데, 짐작하시겠지만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보충역 중대였던지라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거의 없었지만 여러 면에서 군인은, 특히 훈련병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요.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분들은 이런 불쾌감을 훨씬 강하게, 더 오래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 취급이란 게 뭘까요? 군인뿐 아니라, 우리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대학원생은 교수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며느리는 시댁 어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사람 취급이란, 대체로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약자인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어떤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폭넓게 가리키고 있네요.


<사람, 장소, 환대>는 말하자면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책입니다. 책날개를 보면 저자 김현경 박사는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고 나오는데요, 이 책은 과연 에세이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읽기에는 버거운 편이지만 사회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도 노력과 시간을 들이면 읽어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학술 논문보다는 폭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으로 보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는 성원권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시민권이나 투표권처럼, 일종의 자격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격은 누가 어떻게 부여하는 걸까요? 성원권(사람 자격)을 부여하는 주체는 그 사회를 이루는 다른 사람들이고, 성원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이 존재할 곳(장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성원권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환대)을 통해 부여되는 것입니다. 또는 사회 구성원들이 한 사람에게 적절한 환대를 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성원권은 훼손되거나 완전히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원용하여 사회란 어떤 물리적 경계를 갖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합니다. 사회는 대한민국이나 서울시처럼 분명한 경계를 갖는 공간이나 조직이 아니고, 지금 나와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의 집합이 곧 사회입니다. 즉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서울시 인구가 1000만 명이라고 해도 저와 상호작용하고 있는, 혹은 잠재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작을 테니, 현실적으로 제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범위는 제한됩니다.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특정한 예의범절을 지켜 서로와 상호작용하며 서로가 사람임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상호작용 의례를 철회함으로써 서로의 성원권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손님이 식당에 들어가서 종업원을 부르면, 종업원은 보통 손님에게 대답하여 주문을 받을 것이 기대되지요? 어떤 손님이 식당에 들어가서 종업원을 불렀는데 점원이 손님들을 무시하고 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봅시다(1960년대 미국에선 이런 인종차별이 흔했지요). 이처럼 어떤 사람이 받아 마땅한 의례를 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혹은 손님을 쫓아내려 한다거나 폭력을 가하는 식으로 "자아의 영토를 침범"하는 행동은, 그 사람의 사람 자격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가 있을 장소를 빼앗고 그럼으로써 그의 성원권을 훼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 자격으로서의 성원권은 천부인권처럼 어떤 절대자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성원권 인정의 실천적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아주 간단하면서 강력한 예시를 드는데요, 한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고 있으면 나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라고 점잖게 응수할 수 있지만,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놀리고 있다면 내가 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나는 돼지가 됩니다.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처럼요.



 

마지막으로, 장소에 대한 저자의 논의를 조금만 더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 그에게 장소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는 말은 두 가지 층위를 갖습니다. 첫째로는 광장이나 식당 같은 공공시설에의 접근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두 번째 층위는, 모든 이들에게 '사적 영토'를 보장하는 일입니다. 이는 홀로 안전히 물러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는 말과 함께 최소한의 경제적/사회적 자주권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고 말했지요. 이런 의미에서의 사적 영토를 충분히 할당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주부의 지위를 생각해 보세요.


엄마에게 거실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공간이었다. 아니 거실뿐 아니라 집 안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엄마는 온종일 집 안을 돌아다니며 치우고 털고 쓸고 닦으셨다.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치 그렇게 끊임없이 청소를 하지 않으면 주부의 자격이 없어진다는 듯이.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집에 있을 권리가 생긴다는 듯이.

p. 291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서, 4주간의 훈련소 생활이 저에게 그처럼 끔찍했던 것은 군대가 병사 개개인에게 공간과 자율성을 일절 보장하지 않는 '총체적 시설'이기 때문일 겁니다. 잠을 자는 생활관에는 열한 명이 모든 것을 공유하며 모여있었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전우조라는 명목 하에 세 명이 조를 짜서 가야 했지요.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거의 모든 물건과 행동은 금지됩니다. 배식되는 밥을 '감사히' 먹어야 하고, 사비를 들여 마트에 가거나 전화를 하는 모든 행동도 허락을 얻어서 '감사히' 여기며 해야 하지요.


저는 군사훈련이 정확히 4주 뒤에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아 이미지를 크게 왜곡시키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기약 없이 자신의 장소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하여 장소를 주는 일이 현대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향이겠지요. 본문을 인용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프라이버시의 결여—'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 줄 제삼자를 찾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람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 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pp. 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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