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와 살로 이루어졌던 그의 팔이 태초의 세포로 돌아간 듯 자유롭다. 팔 형태를 유지하며 머무는 혈액 입자들이 시야에 붉게 어우러진다. 있는 힘을 다해 L.T의 머리를 껴안아 고정시키며 혈액 부유물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슬러릭스와 뒤엉켜 질어진 입자가 55의 얼굴을 물들였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그의 얼굴, 누군가는 완벽해서 인간미가 없다고 하지만 애초에 인간이 아닌 것에 인간미를 운운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소유주가 죽은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인간형 생리체계 설정에 맞춰져 있는지 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흐른다.
뒤늦게 돌기 시작한 마취 효과에 L.T의 몸부림이 멎어갈 때쯤, 서로 뒤엉켜 무거워질 대로 성장한 슬러릭스 입자도 툭툭 추락했다. 강한 남자다. 자신의 신체가 눈앞에서 바스라지는 상황에서도 팀을 우선시했다. 하긴 강인한 인간이 아니라면 이 무모한 출정에 참가할 수 없다. 인간 외 동력체 교육에서 L.T가 건넨 말은 길지 않았다. “분명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생각보다 더 빨리 닥칠 걸세. 그 순간이 되면 지체 없이 움직여 주도록.”
L.T의 약자가 무어냐고 묻자 그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인저스 앰블럼 위의 택을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그는 매번 혼자 남아 사람들의 인사와 응원, 우려와 불만을 처리했다. 대부분은 과거 중령이었던 L.T가 지휘를 맡는다는데에 안도하는 모양이었다.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지휘관을 맡아주어 다행이에요.’, ‘든든하군. 늘 지지하겠네.’ 체스는 저런 허울뿐인 말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무지의 이유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공감과 응원, 인간 사이의 연대가 주는 강한 상승효과는 인정했기에 가능하면 L.T에게 좋은 말이 많이 들리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눈앞의 남자는 정말 군대에 몸 담았던 사람인가. 대충 스캔해도 거짓 신호가 한두 개가 아니다. 여러모로 진실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체스는 그가 무용담 마냥 떠들어대는 과거의 추억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가 실제로 말단 교육생이었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다. 선두에 서 줄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했다. 그의 치부가 뭐든 그도 나름의 각오로 선의를 베풀고자 하니 우선 신중하게 지켜보기로 한다.
체스의 유하고 꼼꼼한 성향은 그의 1대 소유주이자 3년 연속 체스 챔피언이었던 가마우리의 친모에게서 왔을 것이다. 그녀는 느리고 신중하지만 창의적인 플레이로 자신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다음 챔피언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상식을 넘어선 플레이에 매 시즌마다, 매 승리마다 인간 외 동력체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기에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 테스트를 받은 걸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가마우리의 형제는 무리 없이 왕좌를 건네받았다. 그날 그녀는 웃으면서 울었다. 기호에 다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자신들의 기록이 담긴 패밀리 코어(Family Core)를 어쓰본의 데이트베이스(Date-base)에 심어둔다. 그래서 그런지 체스는 웃으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이해했다. 가마우리가 자신을 가족처럼, 부모의 유산으로 여기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다행이었다. 자신을 통해 부모와 형제의 모습을, 그림자라도 어렴풋이 느끼게 해 줄 수 있다는 게.
“체온이 계속 떨어지는데 어떡하지?”
“나한테 올려줘. 등에 열선을 집중시키면 될 거야.”
55의 요청에 체스는 체온을 기준 이상으로 설정했다. 유명을 달리한 소유주 덕에 여전히 의료 측정 기능을 탑재하고 있지만 그녀를 보낸 뒤 케어 기능은 다 떼버렸다고 했다. 끊임없이 L.T의 생존 신호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55가 새삼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그녀의 마지막 5년은 삶을 유지하기보다 고통을 끝내기 위한 전쟁 같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체스는 55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기억한다. 그녀는 55에게 절대적이었지만 해결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고통을 주는 원인에 불과했다. 체스만 아는 사실이지만 55의 출정 지원 역시 EndAid에서 안락사 승인을 받기 위한 거래 중 하나였다. 숨 쉬는 인간이 하나라도 줄어야 도시 유지에 도움이 되겠지만 죽어야 하는, 죽고자 하는 인간이 너무도 많은 세상에서 그 자리를 꿰차는 것도 경쟁이었다. 원래도 약했던, 55의 친구이자 형제였던 그녀는 폭발에서 살아남은 후 얻은 합병증으로 오랫동안 구원 없는 고통 속에서 버텨왔다. 소녀에서 중년이 되고 앓아오던 후유증에 신체 변형까지. 불법 마약성 진통제로 겨우 버티던 그녀의 행복을 위해 55는 그녀에게 기꺼이 죽음을 선물하고 자신을 버렸다. 그러고 나서도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인 걸 보면 55는 인간미가 없는 어쓰본이 맞다. 어느 인간이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시대인가.
빠르게 남은 사람들을 살핀다. 튕겨 나간 두 명은 즉사했고, 마지막 한 명은 슬러릭스에 기도가 막혔는지 토사물이 흥건하다. 다행히 미약한 숨을 내쉬며 버티는 그를 55가 챙겼다. 체스는 엘티의 카라비너를 단단히 걸어 잠근다. 등에 닿은 그의 몸이 얼음장이다. 인간도 이렇게 차가워진다며 그게 자신과 다를게 뭘까.
늘어 나는 인간 외 동력체의 정체성과 도덕성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화두이자 골칫덩이였지만 이제는 모두가 안다. 정체성 따위를 고민할 수 있던 세상은 더 이상 없다. 도덕성과 윤리를 위한 논쟁은 당장 생존이 위협받는 세상에는 화젯거리조차 못된다. 오히려 하찮은 밑바닥의 가치로도 겨우 취급되는 그 세상에서 가마우리가 자신을 살렸다. 꽃잎처럼 조그맣던 손가락이, 여리고 통통하던 아이의 손이 앙상해지도록. 걷는 보폭이 오리보다 좁아 뒤뚱뒤뚱 따라오던 그 어린아이가 앞만 보고 달린 치열한 노력으로 살린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답게 죽어야 한다.
“곧 2차 웨이브가 올 거야. 갇히기 전에 나가자.”
급격하게 변화하는 공기에 몸이 휘청인다. 55가 공중으로 수십 개의 비상 활성탄을 난사했다. 산소가 급격하게 하락하겠지만 최소한 고갈되는 속도보다 저 거대한 장막에 잡아 먹히는 게 먼저일 테니 걱정할 일은 없다.
“나는 네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참 좋거든? 근데 지금은 그냥 밟, 지직-.”
55의 기척마저 잃기 전에 집중해서 따라붙었다. 운무에게 받은 통신 기어가 생명을 다한 모양이다. 그는 살아남았을까. 애초에 오래된 것이라며 주의를 줬으니 지금까지 버터 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문득 누가 남았을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출정 인원의 얼굴을 한 명씩 기억해 내 본다. 기록을 열람하다 운무에서 멈췄다. 그럴 수 있다. 두 번째 스케일링에서도 마찬가지로 운무의 데이터에서 뭔가가 걸린다. 그리고 미세하게 틴의 정보로 메모리가 치우친다. 사회성 없는 창백한 소년과, 인자한 살신성인의 노인. 둘 중의 어느 쪽이 버그일까.
§
“입구부터 30 미터. 플럭스(Flux) 안정화 확인됐습니다!”
돌아온 휴의 목소리가 밝다.
“시야도 꽤 확보됐습니다. 계측은 못했지만 최소 10미터는 보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굴 내로는 들어오지 못해요. 동굴 벽을 타고 굳어버리더라고요. 우리한테는 다행인 일이지만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대피할 수 있겠어요.”
가마우리의 들뜬 목소리에 조용히 있던 운무가 의견을 낸다.
“나간다고 해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나.”
“디스코 볼에 링크해서 통신을 보내면 돼요!”
“링크가 되어있다고 해도 오차율이 너무 크네.”
그는 현실적인 질문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달나가 링크에는 성공했지만 오차 반경이 컸다. 그마저도 신호가 굴절되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 앉아서는 답이 없어요.”
“포기하자는 게 아니네. 최소한 대비를 해서,”
운무가 고개를 저으며 맞받아친다.
“그럼 영감님은 계세요. 저도 가야겠어요.”
달나가 씩씩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상은 달나의 밝음을 쉽게 앗아가지 못했다. 혼자 치료를 하겠다고 우긴 후 상처 부위를 감싸는 형태로 반다나를 감고 나타났다. 한쪽 눈은 여전히 부어있었지만 그 모습도 썩 나쁘지 않아 그녀 답다고 생각했다.
“저도… 이렇게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조용하던 틴이 갑자기 말을 바꾼다.
“슬러릭 베일은 16시간 간격으로 양상이 바뀐다는 결과가 있어요. 씨드도 13시간 이후부터 활성이 사라지니까 최소한 그때까지는 지켜보는 게 맞아요.”
틴의 결론은 군더더기 없이 논리적이다. 최우선으로 챙겨야 할 알량한 안전을 생각한다면 대기해야 한다. 생존 확률이 올라갈 수 있는 최선을 따라 움직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때는 너무 늦겠지. 말없이 앞장서는 가마우리의 뒤를 따르며 달나가 그들을 향해 말한다.
“따로 움직이기로 해요. 여기서 둘 대기, 그리고 저까지 셋은 정찰하고 올게요.”
“우리만 살겠다고 하는 말이 아니네.”
“알아요 영감님. 레인저스에 지원하는 순간부터 살기위한 선택같은 건 없을 거예요.”
•••
동굴의 입구를 향해 가는 길은 지난했다. 지면의 높낮이는 예측할 수 없었고 들쭉날쭉한 지반의 강도에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했다.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들어올 때와는 분명 다른 지형이다. 문득 여기가 정말 동굴 내부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내부에서 봤던 석주(石柱)를 떠올린다. 떨어지던 차가운 물방울도.
휴가 능숙하게 앞정서면 발을 디딜만한 곳을 확인했다.
“원래 여기저기 많이 싸돌아 다녔어요.”
“여행가였어요?”
“비슷한 거죠. 구조대로 일했었고, 나중에는 배정받은 피보호자가 원해서. 소개할 기회가 없었죠? 55, 체스 그리고 저까지 셋이 이번에 참가하는 어쓰본이에요.”
그럼 지금 피보호자는 어디에 있냐는 질문을 삼킨다.
“다행인지 그는 폭발까지도 살아있지 못했어요. 자살했거든요.”
산악인이 다리를 잃었으니 정상참작 될만하죠. 경사가 높아진 지형에 잡을만한 돌부리를 고르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경사가 가파르니까 제가 앞장 설게요. 한 명씩 올라가기로 합시다. 그리고 루프 주세요. 저한테 연결하겠습니다.”
“뭔가 이상해.”
더디지만 맨 뒤에서 잘 따라오던 달나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돌아가 봐야겠어.”
다시 몸을 돌려 발을 내딛는 그녀를, 순식간에 암벽 아래로 내달려 온 휴가 막는다.
“미안해요. 지금은 못 가요.”
둘은 말없이 대치했다. 휴는 달나를 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달나 역시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갑자기 왜 그들을 확인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는지 달나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자신을 막는 휴의 태도에 무언가 벌어지는 걸 확신했을 뿐이다. 역시 가마우리의 마음도 급했다. 이기적이지만 남아있는 둘의 안위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고 싶었기에 달나가 걱정이 기우라고 가벼이 여기고 싶었다. 동굴 내부에서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슬러릭스 돌발 상황이 있다면 그것 또한 그들의 선택이다.
잠시 후 휴가 순순히 길을 텄다. 내키지 않았지만 다시 걸음을 한 그곳에는 숨이 붙어있을 만큼만 목이 그어진 운무와 그의 상처에 헴노바를 분사하는 피투성이의 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