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새장안에 들어가 보는 것."
옛날에는 사랑과 자유가 끝과 끝에 있고,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구속이고 제한이다. 결혼을 할 때도, 수갑과 같은 반지를 상대방한테 끼워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관계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은 상대방을 많이 구속하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매란 말도 있듯이, 부모들도, 다 사랑하니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구속하기도 하듯이 말이다. 사실 인간들은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이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제한이 필요하고, 매너가 필요하고, 서로 맞추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는, 자유가 어느 정도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지만,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조종이나, 선택할 수 없다. 뭐..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렇게 행동해서 사랑받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가짜 사랑이다. 언제까지나, 가면을 지속할 수 없고, 당신은 진정한 채워짐을 느끼수 없다. 당신은 그저 당신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당신을 사랑하고 말고는 온전히 상대방의 영역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사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는 것 같다. 구속으로, 당신을 사랑하니까, 아무도 당신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만 보겠어하며 소유욕을 나타낼 수 있지만, 나라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 사람을 사랑해, 이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이 사람을 생각해서 많은 것들을 한다. 특정한 선물을 줄 수 있고, 조언을 해줄 수도 있고, 세상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고. 하지만 이것이 이 사람한테 좋을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 사람이 혼자 결정하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공간을 주고,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하나의 사랑의 방법일 수 도 있다. 또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방식이 그 사람에게는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람의 불완전함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으로 행복해하는 것. 그 사람의 존재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내가 사랑하고 싶은 방법이다.
하지만 언제, 얼마나, 어떻게 개입하고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자살 직전의 상태인데 사랑이라고 내버려 두는 것 또한 방치라 보일 수 있다. 결국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줄 때에는 바라는 마음이 없이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내가 주는 것을 받고 말고는 그 사람이 선택할 문제이고, 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이 받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설득을 하거나, 노력과 인내를 통해 사랑을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너무 도와주고 싶은데도, 그 사람만의 공간을 주는 것 또한, 하나의 사랑 방법이다. 나만 나를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상대방의 세계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상대방의 세계 안에, 새장 안에 들어가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일 수 있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