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힘들 때, 나에게 보내는 위로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너무 많은 일이 겹쳐있어 세상이 풀리지 않는 매듭 투성이 인 것만 같다.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다. 반짝반짝 행복한 순간은 너무 짧은 순간 피었다 지고, 이제 내 앞에는 쓰고 혹독한 시간만 남아있는 것 같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사는 건 형벌일까.
어떤 사람에게 내 인생은 고요하고 매끄럽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고, 그 안에서의 휘몰아치는 슬픔과 기쁨의 크기를 타인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센스 없는 종업원들이 나를 향해 '고객님'이라 부르는 대신 '어머님'이라는 호칭으로 라벨링 해버리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감정을 지긋이 들여다보는 것이 어설프고 서툴러서, 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몰랐었다.
종종 슬프고, 느닷없이 서럽고, 막연하게 불안할 때. 누군가에게 나 이렇게 아프다고 하소연하고 울어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 하면서 캔디처럼 괜찮은 척 견뎌내야 하는 건지.
한 때는 밤새 술잔 기울이며 속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확실히 감정은 바닥에서 다시 위로 조금씩 떠올랐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두들 자기 앞에 펼쳐진 버거운 생과 고군분투하느라 시간 내어 만나는 일도 이제는 쉽지 않다. 친구들은 저 자신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에 대한 걱정도 짊어지고 있는데, 나의 우울감을 전염시키는 것은 안될 일 같다. 또한 실체가 없는 나의 괴로움이 누군가에게는 '때 늦은 중년의 사춘기', '유한 마담의 심리적 방황'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많은 책과 영화, 음악 속에서 어떤 특정한 메시지가 내 기분을 더 낫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넌 특별해', '다 잘 될 거야', '간절히 원하면 이룰 수 있어' 등의 위로는 나에게 전혀 와닿지 않았다. 진짜 나다움을 찾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극복하라는 말들은 현재의 내 모습을 부정하는 것 같아 어쩐지 불편했다.
그 보다는 인간 역사와 과학적 진실, 철학적 사고를 통해 내 존재의 의미와 한계를 직시할 때, 나는 오히려 안도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iness)>을 열독 하며 과한 자의식이 불행의 원인임을 깨달았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Status Anxiety)>을 통해 어쩌면 나의 속물근성이 '열망', '꿈'이라는 그럴듯한 허울로 포장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Phnéomélogie de la Perception)>을 공부하며 내 팔, 다리, 내 몸과 살이 느끼고 감각하는 이 세계를 다시 돌아보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Gravity)>를 보면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에서,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한계를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감정의 몫은 늘 남겨져 있다. 한 존재로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우주적 외로움)
별 먼지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내 존재가 한없이 작고 희미하게 느껴질 때. 내가 찾아낸 스스로의 위로 방법은 '나는 정말 작고 희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패배주의적 무기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세속적 수식어를 걷어내고, 본질에 앞서는 나의 실존에 대해 집중하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사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프레임을 크게 넓혀서 내 삶을 아주아주 멀리서 바라보려 한다. 그러면 나는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한 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작은 존재. 행복이란 감정을 찾아 번뇌하도록 설계된 유전자의 탈 것(vehicle)에 불과한 별 먼지이다.
나는 생물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다.
나의 내면세계는 온갖 자의식과 욕망으로 가득 차 요동치는데 우주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사실은 별거 아니다.
무아지경
그다음엔 한껏 높아진 자의식을 놓아버리고 무언가에 몰입해 버린다.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될 때의 쾌감, 더 나아진 결과물에 만족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성취감, 반려견을 보듬으며 얻는 교감, 아름다운 예술을 향유할 때의 충만함, 남편과 맛있는 음식 먹으며 도란도란 세상 얘기 나눌 때의 공감. 지금 여기에 몰입을 하는 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영역이고, 이런 삶의 태도를 통해 나는 나를 위로한다.
천하에 무엇이 약이 되느냐 하면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은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은 없다. 예술 작품이 소중한 것은 황홀하여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잊고 자타의 구별을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강상중은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 자본주의가 부추긴 자의식 과잉이 고뇌를 유발한다고 말하며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에서 발췌한 위 문구를 인용한다.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당신 다우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낱 '별 먼지'치고는 나쁘지 않은 삶이다.
아니 나쁜지 좋은지 모르겠다. 혹은 나쁘면 또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