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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May 08. 2021

진짜 행복

나는 꽤 시니컬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아 이게 바로 행복이지!라고 느끼는 일상의 순간이 있다. 남편과 함께 나의 반려견 루이를 산책시킬 때가 그렇다. 

루이는 모든 강아지들이 그렇듯 산책을 좋아한다. 보통은 엄마와 함께 하던 산책길에 아빠까지 동행하면 루이는 더 신이 난다. 한껏 들떠서 기뻐하며 행복을 만끽하는 루이를 보면 산다는 건 확실히 근사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보살피고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이 나도 좋다. 내가 무척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당장의 골치 아픈 일들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남들 기준에는 하찮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순간. 나는 이 순간들을 진짜 행복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는 동물들의 수명은 인간의 것보다 더 빠르게 소진되는데, 나에게 남은 행복은 얼마나 될까 계산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김병욱 pd의 시트콤처럼 삶이 느닷없이 멈춰야 한다면 그게 이 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너무 행복한 이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 




나의 반려견 루이가 많이 아프다. 

우리는 9년 전 5월 동물보호소에서 만났다.

루이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나이가 꽤 들어 여러 가지 지병이 있다. 나는 나름대로 철두철미하게 루이의 지병을 관리했고 지금까지는 우리 모두 꽤 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밤, 루이에게 다른 응급상황이 생겼다.

기분 좋게 한잔 하고 풋잠이 들었던 나와 남편은 자정 무렵 루이의 비명 소리에 놀라서 깼다.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기괴한 비명 소리, 루이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건 마치 존재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그 소리의 기억은 이후로도 며칠 동안 귀가에 날카롭게 맴돌며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우리는 곧장 24시간 진료를 하는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루이를 처음 보호소에서 데려왔을 때 폐렴을 치료했던 곳이다. 당직 수의사는 루이의 9년 전 진료 기록과 우리의 진술을 토대로 해 뜰 때까지 검사와 관찰을 반복했다. 그러나 뚜렷한 원인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루이는 여전히 괴로워했고 나와 남편은 루이 옆에서 밤을 새웠다. 


아침 10시가 돼서야 루이를 최근 몇 년간 치료해 온 병원으로 갔다. 주치의는 다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주치의는 방광에 있던 결석이 다른 곳에서 관찰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방광 파열이 의심된다는 소견과 함께 상급병원으로 이관시켰다. 보호자들이 난생처음 들어보는 비명소리를 언급할 때는 대개 동물들의 장기가 파열될 때였다는 경험을 들려주면서.


방광이 파열되었을 거란 얘기를 들으니 후회와 원망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루이의 배뇨 활동이 지난 며칠간 이상해서 바로 전날 이 병원에 내원했었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요도 결석이었고, 플러싱 방식으로 결석을 방광 안으로 도로 밀어 넣는 처치를 받았다. 이때는 개복수술이 어려운 노령견에게 최적의 처치라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이게 자극과 부담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급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초음파, 피검사를 반복하고 장시간에 걸쳐 조영술 검사를 추가로 실시했으나 어느 부위가 파열되었는지 명확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석이 장기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고, 방광 속 소변량이 소실되고 있다는 것이다. 

담당 수의사는 루이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마취로 인한 사고위험은 약 10%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남편과 나는 수의사의 판단을 믿고 루이에게 응급수술을 받게 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던 시간은 너무 힘들었다. 문득문득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몰아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면 휴대폰 속에 저장해둔 루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추억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 아빠가 마음 강하게 갖고 이렇게 기다릴 테니까 루이도 힘내서 이겨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한 시간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수술은 거의 3시간 동안 이어졌다. 담당 수의사는 저녁이 되어서야 수술실을 나왔고, 환복도 하지 못한 채 수술 결과를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파열된 곳을 수복하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파열 위치와 방향이 좋지 않아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고, 수술 전 설명했듯이 요관폐쇄와 신우 이상 가능성이 있어 당분간은 매우 철저하게 모니터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소견이 있거나 2차 수술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할 테니 전화연락 잘 받아달라고 했다.    


며칠을 긴장 속에서 보냈지만 다행히 병원으로부터 긴급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한 번은 한 밤중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나와 남편이 혼비백산한 적이 있는데, 동명의 다른 강아지 견주로 착각해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이제 루이의 위중한 상태는 지난 것 같다. 의료진은 매일 아침 루이의 상태를 사진으로 전송해주고, 주치의는 전화로 그날의 검사 결과를 자세히 알려준다. 

오늘로써 루이가 입원한 지 일주일째다. 예상보다 입원기간은 길어질 것 같다. 매우 더딘 속도지만 다행히 루이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나와 남편은 루이를 면회하기 위해 매일 병원에 간다. 볼 때마다 루이의 눈빛에 조금씩 더 힘이 생기는 것 같아 우리의 마음도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서로 다른 종이 만나 이토록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그런데 그건 인간의 역량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상대인 '개'의 특성 때문이라고 본다. 

개들은 어쩜 이렇게 다른 종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하도록 설계되었을까. 지구 상에 이런 생명체가 있어 인간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반갑다고 핥아대고, 소파에 앉으면 몸을 비비며 기대고, 침대에 누우면 겨드랑이 속을 파고들어 안기던 녀석.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면 우주의 고아처럼 엄마를 찾아다니던 녀석. 

나와 남편에게 루이의 빈자리는 너무 크다. 

그런데 우리는 루이가 없어도 배가 고프고, 일하러 나간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는 실실 웃는다. 루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내가 벌을 받아 루이의 고통을 나눠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루이가 나에게 선물하는 행복에 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척 쓰리다. 무력감이 힘겹다.

나는 그저 진짜 행복한 일상의 순간들이 어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기원하고 있는 한 인간이다.


장-루이 프랑소와 르 블랑. 좋은 집에 입양 가서 귀한 존재로 살아가라고.. 임시보호 당시 내가 좀 오버해서 지어준 이름. 결국 입양 보내지 않았고 우린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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