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간비행 Mar 13. 2021

봄 기억

가슴속이 울렁울렁하고 코 끝이 시큰하다. 봄바람 때문이다.

유독 추위에 약했던 나는 봄을 반가워하지만, 속 편히 아이답게 즐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햇살은 제법 따뜻하지만 여전히 쌀쌀한 3월의 봄바람. 들뜬 듯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지금 이 순간 우울한 사람은 우주에 나 혼자 뿐인 걸까.라고 생각했다.




3월이면 어김없이 시작되던 새 학년, 새로운 만남. 

그 낯선 환경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의 긴장감을 무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새 학년이 시작되는 봄에는 지독한 감기와 몸살을 한 번씩 앓고 보냈다. 

나는 이상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무리에서 늘 혼자 떨어져 다른 반으로 배정되었다. 그러면 곧 내가 가진 101가지 측면 중에서 밝고 유머러스한 부분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고 애를 쓴 까닭에 새로운 친구들을 금세 사귈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을만한 포인트를 잘 알고 있었던 나는 학급에서 꽤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동급생들의 인기투표로 결정하는 거의 모든 항목에 선출되어 무리에서 줄곧 앞장서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 있는 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을 지우고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사람들의 감정 변화를 알아채는데 민감했던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소하고도 쓸데없는 많은 부분을 신경 쓰며 곤두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데 온통 내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감정을 그때그때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아뒀다가 중립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멋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엄마가 식탁 위에 산딸기와 앵두를 올려주시는 초 여름이 되고 나서야,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에 익숙해졌다. 담벼락에 핀 진분홍 장미가 꽃 향기를 진동하면 이제 긴장을 풀어도 된다는 큐 사인을 받은 것처럼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어렸기에 어리석었던 나는, 진정한 친구가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취향과 고민이 비슷한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생각했다. 등하교를 함께하고 도시락을 같이 먹는 친구들은 내 마음을, 내 생각을 모를 거라고 우울해하며 완벽한 단짝 친구를 만나게 해달라고 일기장에 소원을 적기도 했다. 완벽한 단짝 친구를 만나면 남녀의 사랑보다 더 단단하고 위대한 우정을 쌓아가리라 다짐했다. 

네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너의 존재만으로도 이렇게 흠뻑 좋아해 주는 나 같은 친구가 있어서. 너는 참 복도 많다며. 반려견 귀에 속삭이며 부러워했다.


나에게도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늘 곁에 있었다.
그런데 만약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나처럼 완벽한 단짝 타령이나 하며 외롭다고 한다면 정말 서운해할 일이다. 어쩌면 큰 배신감을 느껴 다시는 나와 같이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소풍 가는 버스에서 내 옆에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물론 내 속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냥 친구들 무리 속에서 하하호호 장단 맞추는 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꿈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아이들은 나만 모르는 얘기를 나누느라 즐거워 보이고, 여기에 네가 끼어들 자리는 더 이상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외롭고 외롭고 또 외롭다. 

이런 사춘기 해프닝 같은 악몽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종종 되풀이된다. 

꿈속에서 나는 여전히 열세 살, 열다섯 살, 열여덟 살쯤에 머물러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휴우. 어른이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영화관에 가고, 혼자서 해외여행을 가도 외톨이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또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지점이 나와 무척 닮은 남자가 곁에 있어 안도한다. 

지금 나는 외롭지 않다고 미소 짓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