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아미의 방탄 입덕기
지난 글에서 살짝 고백했듯이,
나는 일생동안 아이돌 음악을 기피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BTS의 팬이 되었다.
어나더 레벨
나는 BTS를 첫 조우한 그날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9년 봄, 강의 자료 준비로 유튜브를 서치를 하다가 우연히 2018 MMA 연말 무대 퍼포먼스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퀄리티와 크리에이티비티 수준에 너무 놀라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한국적인 것을 이렇게 힙하게 재해석하다니. 올림픽 행사보다 훨씬 낫잖아. 아니 대체 얘네 뭐지?'
궁금증에 조금씩 정보를 찾다가, 결국 그날 나는 밤을 새웠다.
아이돌은 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 그저 그런 퍼포머라고 생각해 음악을 제대로 듣지 않았는데 왜 요즘 아이돌은 '아티스트'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가창력을 갖췄고, 음악을 진지하게 대한다. 그리고 춤과 스타일링을 포함한 모든 비언어적인 것을 동원해 메시지를 전달한다.(특히 지민이는 머리카락 움직임으로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너무 깊이 있다.
그 이후로 몇 달 동안 방탄소년단에 관련된 것들을 섭렵하느라 하루 3-4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피곤하거나 졸리지가 않았다. 이런 '각성상태'가 입덕 시기의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한다.
음악에서 시작해서 이들의 성장 스토리, 치열한 인생 고민 등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더욱 빠져들었다. 알면 알수록 나는 BTS의 음악 수준에 감탄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마인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경이롭게 느껴졌다.
이들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인생의 진리를 깨우쳤을까. 이런 젊은이들이 끌어가는 문화로 채워진 나라라니.
아,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구나!
위로받는 느낌
방탄소년단의 음악 가사는 대개 그들이 직접 쓴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고민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데 방탄소년단 멤버들 하나하나는 놀라우리만치 매우 순수하고 건강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이들의 솔직한 얘기들은 세대와 언어를 뛰어넘는 공감을 끌어낸다. 어린 나이지만 삶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을 했던지, 이들의 가사는 매우 심오하고 때로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처음 BTS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런데 나와는 세대 차이 한참 나는 어린 뮤지션들의 이야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내 가슴을 울렸다.
나는 노래 가사에 많이 울었고, 위로받았다.
우린 꿈을 남한테서 꿔 (빚처럼) / 위대해져야 한다 배워 (빛처럼)
너의 dream. 사실은 짐 / 미래만이 꿈이라면
내가 어젯밤 침대서 꾼 건 뭐? / 꿈의 이름이 달라도 괜찮아
...
We deserve a life / 뭐가 크건 작건 그냥 너는 너잖어
...
멈춰서도 괜찮아 / 아무 이유도 모르는 채 달릴 필요 없어
꿈이 없어도 괜찮아 / 잠시 행복을 느낄 네 순간들이 있다면
...
너를 이루는 모든 언어는 이미 낙원에
낙원, 2018
나는 남들이 안정적이라 말하는 대기업에 다녔지만 불행했다.
회사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롤 모델이 없다는 것이었다. 매 시즌 영혼을 갈아 넣어 아웃풋을 만드는 사이클을 평생 반복해야 할게 깜깜했다. 행복한 미래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고, 견디고 버텨서 끝까지 오른다 한들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던 공부를 다시 이어갔다. 오랜 실무경험에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더해지니, 나를 필요로 하는 곳들이 생겨 강의를 했다. 하지만 학교라는 생태계는 생각보다 매우 불투명하고, 교수 사회는 회사보다 훨씬 수직적이었다.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나는 다시 예전처럼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낙원을 향하며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힌 삶을 살고 있었다. 목적과 목표의 경계를 잊은 채, 내 꿈인지 남의 꿈인지 모를 것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개미를 본 적 있어? / 단 한 번에 길을 찾는 법이 없어
수없이 부딪히며 기어가는 / 먹일 찾기 위해 며칠이고 방황하는 (You know)
쓸모 있어 이 좌절도 / 난 믿어 우린 바로 가고 있어
언젠가 우리가 찾게 되면 / 분명 한 번에 집으로 와
개미처럼
...
아직은 어려운 걸 이 길이 맞는지 / 정말 너무 혼란 스러
don't you leave me alone / 그래도 믿고 싶어 믿기지 않지만
길을 잃는단 건 / 그 길을 찾는 방법
Lost, 2017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곤 했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니 그 목적이 맞는 건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내 삶을 이루는 모든 사소한 선택들을 후회하며 끝없이 자책했다. 미로에 갇힌 기분. 바보가 된 기분.
그런데 BTS의 노래는 그 모든 고민과 방황도 내 길을 찾는 과정의 일부라고 말하며 위로를 건넸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그 메시지
시니컬한 완벽주의자인 나는 나 자신에게 유독 까칠했다. 그래서 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모습은 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다른 멋진 누군가처럼 될 언젠가를 늘 상상했다. 그러다 보니 현재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나의 현재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써 희생되기 일쑤였다.
네가 뭐 어떠냐고, 지금 상태로도 괜찮은 거 아니냐는 좋은 친구들의 위로에 가끔 숨 고르기도 했다. 그런데 곧 다시 못된 기질이 꿈틀대면서 모든 걸 넘치도록 잘 해내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리고 내 기준에 못 미치면 모든 과정이 가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없이 질주 하가다 마음 내려놓았다가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중생에게, BTS는 말했다.
좀 부족해도 이대로의 내가 곧 나라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조금은 뭉툭하고 부족할지 몰라 / 수줍은 광채 따윈 안 보일지 몰라
하지만 이대로의 내가 곧 나인 걸 / 지금껏 살아온 내 팔과 다리 심장 영혼을
사랑하고 싶어 in this world / 빛나는 나를 소중한 내 영혼을
이제야 깨달아 so I love me / 좀 부족해도 너무 아름다운 걸
I'm the one I should love
Epiphany, 2018
내 마음을 적신 수많은 BTS의 노래 중 <Epiphany>는 특히 더 공감했다. BTS의 멤버 Jin이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과 상대적 콤플렉스, 그리고 그냥 묵묵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지속하면서 담담히 이겨내는 모습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붓다가 환생했다면 바로 석진이가 아닐까.
전 세계 수많은 팬이 있는 만큼, BTS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내가 아미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음악적 메시지와 삶에 대한 태도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여타의 책이나 강연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러나 BTS의 메시지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솔하게 들려주기에 더 와닿는다. 그리고 수준 있는 음악과 퍼포먼스, 스토리 텔링의 미적 조화를 통해 임팩트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에 메시지는 더욱 강렬하게 전달된다.
또한 멤버 개개인이 보여주는 진솔한 태도와 성장해가는 모습을 통해 이들의 음악과 생각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BTS의 음악을 들으며 나도 그들처럼,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