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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Sep 04. 2021

기록의 발견


8월의 마지막 날 이른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두 달 동안은 기상 알람을 5시 30분으로 설정했다. 일찍 일어나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남들처럼 운동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그럴싸한 모닝 루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래도록 여름 기분을 누리고 싶어 일찍 일어난다. 고백하건대 나는 여름을 열렬히 좋아한다. (오 여름!)

이토록 좋아하는 계절이 하루하루 흘러가는 것이 아쉬워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그냥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이때 중요한 것은 맥락을 찾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발견하려는 애쓰는 순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지고 더 근사하게 보이려 꾸밀 테니까.




쓸모 있는 딴짓

학창 시절 나는 다이어리 꾸미기와 예쁜 펜 사모으기에 열중하던, 전형적인 딴짓하는 아이였다. 늘 형형색색 다양한 필기구와 컬러링 도구가 가득한 대형 필통을 2개 가지고 다녔고, 수업시간 내내 고개를 처박고 노트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쁘게 기록할지 비주얼에 열을 올리며 일러스트와 도표 그리기, 색칠에 신경 쓰는 편이었다. 덕분에 시험 기간에는 친구들이 종종 내 노트를 빌려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필기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내가 오죽 답답했던지 필통을 압수해가고, 색깔 펜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그렇게 공들여 기록했던 노트들은 내가 해외생활을 하는 동안 부모님이 집을 옮기면서 어디론가 다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빌려갔던 나의 고등학교 생물 노트를 20년 만에 돌려줬다. 대학교 교양 생물 시험공부를 하느라 빌려갔었다고 한다. 나름의 인포그래픽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어서 도움이 되었다면서.


맞아, 나의 쓸데없는 딴짓이 누군가에게 가끔 쓸모 있었지! 이제 기억이 났다.

  

선명한 기억

친구들은 종종 나의 디테일한 기억력에 놀란다. 20여 년 전 첫 미팅 멤버가 누구였는지, 어느 해 여름방학에 함께 여행 가서 뭘 먹었는지, 그 동아리 선배의 이름이 뭐였는지, 그때 왜 싸우고 헤어졌는지. 친구들이 기억을 더듬거릴 때 '사실은 이러했어'하고 알려주면 흠칫 놀라며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왜 그렇게 다 기억하고 있느냐고 정색도 한다.


왜냐면 나는 꽤 오랫동안 매일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스케줄 관리와 일기의 중간 형태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내 모든 행동을 기록했다. 물론 다이어리 기록도 비주얼에 치중하느라,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구입하지 못하면 직접 만들어 쓰곤 했다. 그곳엔 객관적 사실뿐 아니라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차곡히 쌓였다. 음악, 영화, 연극, 공연, 전시 등의 감상과 책에서 찾아낸 좋은 문장들. 어디선가 들은 재미있는 농담. 문득 떠오른 영감. 그리고 수 없는 혼잣말.


나는 마음이 정처 없이 나부낄 때면 오래전 쓰던 다이어리들을 뒤적인다. 일희일비로 가득 찬 내 역사를 들여다본다. 아, 그때의 경험이 현재의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구나. 그때도 지금도 나는 여전하구나.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선명히 확인한다.


다시, 기록

기록을 멈춘 건 6-7년쯤 전이었다. 그즈음 나는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고, 긴 방황 끝에 아이 없는 부부로 살기로 결정했다. 일이 싫어졌고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이 없었다. 언제 떠나도 미련 없을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봐도 흠. 하고 말았다. 더 특별하고 근사한 것들이 세상엔 가득한데 이건 별거 아니지.라고 나의 일상을 무시했다. 그렇게 한동안 기록은 멈춰 있었고, 그 기간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희미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기록을 다시 하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다시 기록을 시작하면서 세운 단 하나의 원칙은 나 혼자만 본다는 점이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는 누군가에게 공개하려는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 지나친 필터링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의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생각을 외면하고 더 특별하고 근사한 것을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화려한 파랑새가 나에게 진짜 행복을 가져달 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나를 돌보는 시간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작정을 하고 나니, 나의 구차하고 시시한 시간들이 사진과 글로 빠르게 쌓여갔다. 아이패드 메모 앱에 오늘은 뭘 먹었고, 뭘 보았고, 어떤 대화를 나눴고, 무엇으로 인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남겼다. 메모의 과정은 의식하지 못한 채 했던 나의 말과 행동을 조금 객관적으로 돌이켜보게 한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에 좋아하는 것들의 사진을 올렸다. 이른 저녁의 오렌지색 하늘,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길가의 풀들, 꼬질꼬질해진 반려견의 수염, 차가운 잔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 서점에서 발견한 예쁜 책 표지. 좋아하는 것들의 사진을 주욱 모아놓고 들여다보면 그리 불행한 인생은 아니다. 매일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 정도면 좋다!라고 생각한다.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끔씩 자책하곤 했는데, 기록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야’

차곡히 쌓인 기록을 보면 나는 매일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었다.

기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수고를 들여다보며, 나를 조금  너그럽게 대하게 한다.

기록은 나의 역사를 쌓고,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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