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한 구차한 변명 (1)
며칠 전 일이다.
회의자료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제시간에 회의장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아 X 됐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우리 집 아픈 노령견 루이를 그냥 두고 나가면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데 루이 상태가 최근 많이 안 좋아져서 혼자 두기 불안한 정도다. 시간 맞춰 심장 및 신장, 폐, 관절 통증 관련 약을 투약해야 하고, 호흡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불안정해지면 지체 없이 응급실에 가야 한다. 그래서 보통은 외출 전에 왕복 1시간 거리의 친정 부모님 댁에 루이를 맡긴다.
그날은 다급하게 아빠에게 SOS를 쳤다.
나는 지금 총알처럼 나가야 하니, 30분 이내로 루이를 픽업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실은 학기 중에는 종종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레이서처럼 차를 몰아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해 일을 마쳤다. 긴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저녁 늦게 루이를 데리러 부모님 댁에 갔다.
그런데 엄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잡아끌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빠가 네 집안 꼴을 보고 너무 화가 나셨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엉망진창인 집 같다고.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고 개지도 않은 빨래가 잔뜩 있다고. 바닥에는 다 루이 물건 천지고.
애도 없는데 그렇게 돼지우리처럼 해놓고 집안일도 안 하면 성 서방이 얼마나 싫어하겠니?"
후.. 엉망진창인 건 반박할 수 없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왜 이렇게 집안일하는 게 싫을까. 뭐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마는.
나도 바쁘다고요. 나도 집에서 일하고 있어. 집에 있다고 그냥 노는 거 아니야.라고 항변해 봤지만, 엄마 아빠는 늘 '너는 애도 없는데'에 방점을 두신다.
우리 부부는 애초에 아이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한국사회와 교육 현실에 대한 냉소, 양육의 책임감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그리고 우리 부부의 경제 수준으로 어느 정도의 양육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까. 과열된 교육 경쟁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 등등을 고민하며 우리는 끝없이 토론했다.
엄청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서술했지만, 사실은 아이를 키운다는 게 그냥 무서웠다.
내 아이를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다가 마흔을 코 앞두고, 나와 남편은 더 늦으면 아무런 선택을 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갖도록 해보자고 합의했다. 저절로 생기지 않으니, 병원의 도움을 받으며 딱 3년 동안 노력하기로 계획했다. 그 계획한 기간 동안 우리는 관련 분야 최고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으며 중형차 한 대 값은 족히 쏟아부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결국 내 건강상태가 따라주지 않아서 아이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은 조금의 미련도 후회도 없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응원하던 팬들보다 오히려 더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런 심리일까.
지금은 이렇게 평온을 되찾았지만 그 당시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호르몬 불균형으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기도 했거니와, 인생에 대한 분노와 우울감이 나를 잠식해버렸다.
하던 일도 다 그만두고 이렇게 전투적으로 최선을 다 했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내 노력 때문도 아니고, 내가 노력한다고 다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인생이 그냥 그런 거고. 운과 때가 들어맞고, 우연이 겹쳐 방향이 정해지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하는 거구나.
아, 인생이 이런 거구나!
삼척동자도 깨친 인생의 진리를, 나는 불혹을 넘겨 돈 잃고 직장도 잃고 건강도 잃고 나서야 깨닫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아무튼 나와 남편은 아이 없는 지금의 삶에 매우 만족한다.
여우의 신포도 이론은 아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고, 반려견 루이로 인해 일상에 즐겁고 사랑스러운 소소한 일들이 빼곡히 차 있어서 아이에 대한 결핍을 느낄 틈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나중에 더 나이 들어 불러주는데 없고, 혈육도 없고 돈 없는 노인네라고 박대받는다면 가슴 치며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뭐. 지금은 이대로가 좋다!
이야기가 좀 샜다.
아무튼 우리 부모님은 뭔가 내게 걱정 및 당부 같은 말씀을 하실 때마다 '너는 아이도 없는데'라는 표현이 종종 따라붙는다. 아이도 없는데 박사 공부한다고 직장 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데 남편 아침밥도 안차려 주고. 아이도 없는데 집은 돼지우리처럼 해 놓고.
부모님은 내가 소박이라도 맞을까 봐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다.
몇 년 전 내가 박사논문 쓰느라 한참 예민해 있을 때 남편은 나를 배려해 세 끼를 모두 밖에서 해결하거나, 배달음식을 시켜서 나를 챙겨줬다. 그걸 아시고는, 아빠는 지방에 가지고 있던 작은 아파트를 팔아 사위에게 외제차를 사주며 미안함을 표현하셨다.
또 지난달에는, 엄마가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또 내 손목을 잡아끌며 목소리를 낮췄다.
"엄마가 꿈을 꿨는데.. 성 서방이 대여섯 살 된 여자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오는 거야. 성 서방 진급하면 지방에 자주 가야 한다며? 남자가 밖으로 나돌면 다른 마음 생길 수 있어. 항상 집안 예쁘게 꾸며놓고 성 서방한테 잘해라."
그러더니 아주 촌스럽게 번쩍거리는, 엄청 굵은 체인 금팔찌를 사위 승진 선물이라며 사다 주셨다.
남편과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니 이건 90년대 할렘가 래퍼들이나 하던 스타일 아냐. 그리고 울 부모님 진짜 별 걱정을 다 하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 아빠의 걱정이 좀 심각하다. 네가 정 집안일하기 힘들면 대신 집안일을 해주러 오시겠다는 것이다. 빼빼 마른 70대 후반의 두 노인분이. 하... 미치겠다.
"그냥 내가 날 잡고 좀 치우든지, 청소 업체를 좀 자주 부를게요."
소박하신 우리 부모님은 내가 가끔씩 청소업체를 이용한다는 것을 평소 못마땅해하셨는데, 이번에는 그 방법이라도 타협하실 모양이다. 엄마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지, 당장 월요일에 청소 도우미 부르겠다고 지금 약속하라고. 마흔 넘은 딸내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자고 하셨다. 당시 목요일이었는데 엄마가 굳이 월요일을 특정한 까닭은, 남편 출근한 평일에 업체를 이용해 남. 편. 모. 르. 게. 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청소 비용을 내주고, 청소하는 날은 루이를 데려가서 돌봐주겠다고까지 제안을 하셨다.
아무튼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거절하고, 잘 알아서 하겠노라 장담하며 엄마를 설득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객관적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한번 둘러봤다.
흠. 돼지우리 정도는 아닌데? 그리고 청소는 어지른 사람이 치우는 게 맞는 거지. 나보다 남편이 더 많이 어지른다고. 여자라고 왜 그걸 다 내가 치워야 하는 건데?
아니, 21세기에 소박이 웬 말이야. 뭐 또 소박 좀 맞으면 어때.
그럴 테면 그러라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