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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Feb 06. 2022

헤이트

제주 포도 뮤지엄에서 보고 느낀 것

어렵게 시간을 내어 남편과 제주에 왔다. 휴식이 필요해서.

우리의 경제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호화로운 호텔에, 가장 전망 좋은 방과 삼시 세끼를 해결할 수 있는 옵션을 포함해 두었으니, 좀 마음 편히 느긋하게 쉬어도 좋으련만.

어리석은 나는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지 못하고, 어제를 후회하며 내일을 걱정하느라 여전히 편히 쉬지 못한다.

전생에 머슴이나 노비였나 보다.




나는 잠시라도 틈이 나면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한다.

노트북, 아이패드, 아이폰, 무선 이어폰과 온갖 충전기를 끙끙 싸매고 다닌다.

그런데 할 것이 많고, 걱정은 그보다 더 많아서.. 정작 한 가지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있으면 저게 걱정되고, 저걸 하고 있으면 이것과 관련된 정보가 또 치고 들어온다.

업무 효율성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타이머 기능의 애플리케이션도 무용지물이다.

무언가 끝내려고 작정한 시간에 딱! 멈춰야 하는데, 항상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 시간을 2-3배 훌쩍 넘겨 지속한다.

그러니 늘 피곤하고 무기력하다.

전생에 머슴이나 노비였다면, 약삭빠르지 못하고 고지식해서 구박당했을지 모르겠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낙천적이다. TV 예능을 틀어놓으면 5분도 안되어 사소한 장면에 아하하! 소리 내어 잘 웃는다.

남편은 이번 여행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외출하지 말고 호텔 안에서 느긋하게 지내자고 제안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보다가 배고프면 라운지에서 맛있는 거 먹고, 수영도 좀 하고 뒹굴뒹굴 낮잠 자며 지내자고.

답답하면 드라이브 나가서 좋은 경치 보면서 충전하자고 했다.

그런데 나는 여행지에서도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려는 의욕이 늘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언제나 체력이 그만큼 안 따라줘서 계획한 일들의 절반도 실천하지 못하니, 금세 어깨가 축 처져서는 자기혐오에 쉽게 빠져 버린다. 헤이트!

전생에 머슴이나 노비였다면, 약삭빠르지 못하고 고지식한 데다가 죽상 하고 다닌다고 매질 깨나 당했을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오미크론이 매섭게 전파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관광객이 밀집된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나로서도 참 조심스럽다.

하지만, 작년에 개관한 아르떼 뮤지엄과 포도 뮤지엄 전시는 꼭!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 한해서 남편과 타협했다.

둘 다 좋았지만, 더 마음 깊숙이 와닿는 것은 포도 뮤지엄의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였다.

(내가 BTS 늦덕 아미이고 지민을 최애로 여기고 있지만, 그 영향은 아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은 인간 사회를 분열시키는 혐오와 혐오표현을 소재로 여러 미술. 설치 작가들이 해석한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지는 전시였다.

가짜 뉴스와 확인되지 않은 악의적인 소문을 앵무새처럼 옮겨 균열을 만들고,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수군대며 우리/그들 혹은 이쪽/저쪽을 가르는 인간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잘못된 소문이 편견을 낳고, 혐오로, 차별로, 학살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례들을 예술작품을 통해 보고 있자니.

또르륵-! 눈물이 흘렀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슨 무슨 충’이라며 벌레에 비유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혐오표현을 서슴지 않는 한국 사회의 요즘 현상이 참. 슬프다!


포도 뮤지엄 3 전시실에서는 케테 콜비츠의 <아가, 봄이 왔다> 전시가 이어졌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의 상처가 한 인간을 삶을 뒤흔들어 작품 주제가 변하고, 화풍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평범한 나날을 살던 한 어머니가 전쟁으로 아들을 잃고, 또 손자와 남편을 차례로 떠나 보내며 느꼈던 고통, 상실감, 공포, 무력감이 작품에 드러났다. 결국 자신의 예술혼을 반전운동의 프로파간다로써 불태웠던 그녀의 작품을 보니까.

또 주룩주룩- 눈물이 흘렀다.

나는 감정의 역치가 매우 낮은가 보다. (갱년기 우울증 노노노)

전생에 머슴이나 노비였다면, 약삭빠르지 못하고 고지식한 데다가, 죽상에다가 맨날 질질 짠다고, 멍석말이 당해 산속에 버려졌을 거다.




머슴이나 노비로 태어나지 않고,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살며 얻어맞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 봐.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아니까 난 갱년기 우울증 아니라고!)




<너외 내가 만든 세상> 제주전의 전시 포스터


헤이트,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되는가? 전시의 여운이 깊이 남아, 포도뮤지엄을 운영하는 T&C 재단에서 발간한 관련 책을 주문했다.


독일의 표현주의 반전화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의 <아가, 봄이 왔다> 전시. 한 예술가의 화풍이 전쟁의 아픔으로 변해가는 흐름을 보면 눈물이 난다.




https://www.podomuseum.com/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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