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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Aug 10. 2023

살아야 하는 이유

루이의 시간 (2)

다들 그런 생각하잖아..
딱히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그래서 갑자기 스위치 꺼지듯 사라져도 나는 크게 아쉽지 않아.



내가 내뱉은 말에, 나의 오랜 친구들은 흠칫 놀라며 반문했다.

'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나는 오래전부터 그랬다.

십 대 후반. 사춘기였던 탓인지 나는 인간 존재가 한없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이리저리 휘청이다가 언젠가 사라지는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백한 푸른 점 속의 작은 먼지에 불과한 내 모습을 자각하고는, 이왕 세상에 던져졌으니 꾸역꾸역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구차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 깊은 우울과 허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내가 다섯 살일 때 헤어진 우리 미키

열두 살 어느 날 느닷없이 나를 떠난 수지

열다섯 살에 이별한 나의 꼬마

스물 다섯 여름에 헤어진 우리 막둥이 가빈이

서른아홉 여름에 떠나보낸 내 동생 차웅이

그리고 두해 뒤 차웅이 따라 떠난 업둥이 귀비


대대로 애견가족인 외가의 영향으로 나는 실내 반려견과 함께 자랐고 

또 그 오랜 세월만큼 많은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반복해서 겪는다 해도 언제나 이별은 무척 쓰리고 힘들었다.


그렇게 먼저 떠난 작고 연약한 내 동생들은 가끔씩 꿈에 나타나 내 마음을 휘젓는다.

십 수년이 지나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가빈이가 가끔씩 꿈에 나와 내 품에 안기기도 하고,

까불이 꼬마가 험한 길가에서 헤매며 나를 찾는 꿈에 울면서 깨기도 한다. 

특정할 수 없는 어떤 흰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내가 잘 챙겨주지 못해 죽음에 이르는 꿈을 꾸었을 때는, 마치 있었던 일인 양 한 밤중에 목놓아 울며 참회했다.


떠나간 반려견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고 정체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게, 심리상담가는 말했다.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떠나보냈기 때문인 것 같군요. 부모님의 방식이 아쉽네요.'


엄마는 늘, 내가 동생들과 작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수지를 보냈다고, 엄마는 거짓말로 둘러댔다.

유학 중이었던 내게 가빈이는 별일 없이 잘 있다고 거짓 안부를 전하며  몇 달이 지나도록 가빈이의 죽음을 숨겼다.

수십 년이 지나서 '엄마, 우리 미키 어떻게 했어? 나 유치원 간 사이에 안락사한 거야?'라고 따져 물어도 엄마는 끝내 함구했다. 엄마는 당신의 방식이 옳았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들도. 나도. 우연히 이 세상에 왔다가 또 홀연히 사라질. 저 끝에 있는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작은 존재들. 굳이 왜 살아야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냉소와 염세에 젖어들었던 것 같다.


꽤 한참 동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 맹렬히 헤맸다.

철학책을 읽으며 거창한 존재 이유를 발견하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철학은 대개 더 깊은 허무로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방편으로 남은 생을 책임감을 원동력 삼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선 엄마가 되려고 무던히 애썼다. 하지만 책임감과 자유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주저하는 시간이 길어져, 엄마가 되기엔 너무 늦었던 탓인지. 다섯 번의 인공수정과 아홉 번의 시험관 시술은 결국 유산으로 끝났다. 온 힘을 다해도 내 뜻대로 절대 되지 않는 벽 앞에서 느꼈던 크나큰 좌절감과 고통.

그렇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더 희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유기견의 임시보호를 떠맡았게 되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임시보호는 정식 입양절차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스스로를 '엄마'라 칭하는 것에 더 이상 닭살 돋지 않게 되었을 무렵, 살아야 하는 이유 따위를 찾아 녹초가 되도록 헤매는 일은 어느새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반려견의 먹거리와 배변자리를 챙기고, 매일 산책시키고, 놀아주고 씻기고 함께 몸을 부대끼며 잠들었다.

나의 반려견과 함께하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박제하고 싶었고, 행복의 감정을 선명히 느꼈다.


반려견을 떠나보내며 살아야 할 이유를 상실했다가, 반려견을 가족으로 맞으며 살아낼 힘을 얻기도 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 인간에게 개는 그런 존재다.

개는 거두어 주는 인간이 우주의 전부인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얼마나 못났고 형편없는 인간인지 따지지 않고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근사한 사람으로 착각하거나 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나의 아들 루이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내가 다섯 살에 그린 그림. 엄마와 나 그리고 내 동생 미키. 미키는 단모 치와와였는데 왜 딱정벌레처럼 그렸을까? 노견의 검버섯을 표현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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