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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 Nov 04. 2024

안전지대 (1) 수영장

파리에서 수영이 가르쳐 준 것들



오랜만에 이른 아침 수영장을 찾았다. 오늘은 Goncourt 역 근처의 Piscine Catherine Lagatu에서 20바퀴를 돌고 왔다. 어렸을 적 이후 워터파크를 제외하고는 수영장에 가본 적이 없다가, 프랑스에 와서 작년 여름부터 다시 시작한 수영이 이제는 이역만리에서 나를 건강하게 지탱해주는 소중한 페이스 메이커가 되었다.




파리 시립 수영장은 10회 이용권이 28유로로 가격이 저렴하고, 수질도 꽤 좋은 편이다. 다만 매우 기본적이고 간소한 탈의실과 남녀 공용 샤워실은 조금 독특하다 (물론 수영복을 입고 샤워한다). Catherine Lagatu 수영장은 25m 길이에 5개 레인을 갖추고 있는데, 중반을 넘기면 바닥이 급격하게 경사지며 끝 부분은 3.5m까지 깊어져 마치 마리아나 해구를 향해 수영하는 것만 같다. 처음 수영할 때는 약간 두려웠었다. 게다가 프랑스 아저씨들과 나란히 수영복을 입고 샤워하는 것도, 수영 모자 없이 수경만 착용한 채 유유자적 수영하는 대머리 무슈들을 보는 것도 조금은 어색했다. 하지만 몇 번 다니다 보니 이 모든 것이 익숙해졌고, 이젠 정이 들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낮은 곳으로 겸허히 흘러간다. 물처럼, 나 역시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강인하게 흘러가며 살고 싶다. 그래서 브런치 닉네임도 水(Su), 물을 뜻하는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자유롭다. 중력에서 벗어나 수영복만 단촐하게 입은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면 몸이 가벼워진다. 부력이 주는 가벼움 덕분에 수면을 힘차게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결연한 의지가 지상에서도 동력이 된다. 일상에서는 무겁게 느껴지던 것들도, 물속에서는 그저 가벼울 뿐이다. 수영을 하며 체력이 증진되고, 심폐 지구력과 폐활량이 강화되었고, 혈색도 좋아졌다. 점점 쉬지 않고 수영할 있는 거리도 늘어가는 것도 뿌듯하고, 꾸준히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결과가 있어 자기 효능감도 증가한다.




수영을 하면서 문득 명상하는 것 같은 평온함에 빠져들 때가 많다. 디지털 기기와 단절되고, 오로지 바른 자세와 호흡에 집중하며 '지금, 여기'의 순간을 느끼는 시간. 수영의 리듬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나면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이 찾아온다. 당장 숨을 내쉬고 들이마셔야 하는 물속에서 잡념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몰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맑은 락스 향이 물속에 퍼지고, 그 안에 온몸을 맡긴 채 리듬에 맞춰 호흡을 내쉬고, 다시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 물살을 가르고. 물속에서 충전되는 강인하고 유연한 에너지가 하루를 견뎌낼 힘을 선사해 준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이민자로서 매일같이 배우고 도전하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수영장은 오로지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안전지대이다. 25m, 파도 따윈 없는 정제된 락스물, 어렸을 적 시민회관 수영장을 떠올리게 하는 락스물 향기, 물속에서의 리듬감, 고요함, 12m 지점에서 급격히 어두워지는 시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속도로 나아가는 내 몸, 그리고 반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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