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어느 순간에는 나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거나,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는 시간 말이다. 며칠 전, 본가에 다녀왔다. 초등학교 6년간 매일 썼던 일기장을 간만에 꺼내 들었다. 행복했던 기억과 우울했던 기억들은 세월이 흘러 빛바랜 종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초등학교 때 빨강머리 앤(Anne Shirley)를 참 좋아했다.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지니가 일기장에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듯, 가끔 어린 시절의 나도 셸리를 불러내서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속삭이곤 했다. 그리고 오늘, 간만에 어린 날의 내 마음, 셸리(Shirley)에게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2020.04.05 날씨 맑음
안녕, 셸리? 나예요.
이게 얼마만이죠? 잘 지냈나요? 너무 오랜만에 당신을 부른 까닭은, 그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서예요. 2003년, 벌써 17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사실 제가 조금 바빴어요. 당신이 지루해할까 봐 오늘은 다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그동안 크고 작은 행복감과 우울함을 겪으면서 어른이가 되었어요~
아, 그동안 문제집도 여러 권 풀었고, 초등학교도 졸업했어요. 피아노 레슨은 중학교 들어가면서 공부에 집중하려고 아쉽게도 그만두었어요. 스피드 스케이트도 그만두었네요... 엉덩이가 무거워서 코너를 못하겠어요! 키는 다행히도 좀 자랐어요! 맨날 줄넘기했던 게 효과가 있었나 봐요~ 수학학원 숙제는 꼬박꼬박 해서 고등학교 때 이과에 갔어요. 깜짝 놀랐죠? 수학 과학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수학 점수가 잘 나오니까 욕심에 공대까지 가버렸어요. 이제는 데이터 과학도 조금 알아요! 너무 멀리 와버렸나요?
코로나 때문에 산책은 잘 못했지만 그래도 가족이랑 종종 집밥도 같이 먹고 있어요. 백수가 되어서 여가생활은 잘 못하지만, 시간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건 감사해요~ 상황 정리가 좀 되면 다시 댄스 스튜디오에 가서 춤을 추고 싶어요! 한 달 프리패스 끊고요. 또, 남자친구도 생겼는데 그는 프랑스인이라 파리로 돌아갔어요. 비자, 언어, 문화, 직장…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그래도 좋아요. 4월에 보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가요. 그래도 그가 재택근무를 하니까 매일 스카이프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셸리, 저는 몇 달 전에 퇴사를 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갖고 있어요. 이제는 수학학원 숙제도 없고, 누가 저를 비교하지도 않고, 내일모레 기말고사도 없는데 여전히 고민은 있네요. 초등학교 때는 기말고사만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니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것들이 투성이라서 가끔은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저 스스로 도화지에 그림을 쓱쓱 그려나가고 있어서 뿌듯해요! 칭찬 좀 해주실래요? 덕분에 요즘 들어 부쩍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요 :) 전 요즘 이런 것들 덕분에 행복하답니다.
이야기를 다 들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는 더 자주 셸리를 부를게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