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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Mar 25. 2024

나의 엄마 문여사

-나의 사랑 문여사를 기록합니다. 

엄마랑 고향마을을 다녀왔다. 


햇살이 잘 드는 시골 밭에는 벌써 고사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지난가을 마른 고사리대로 듬성듬성 덮어 놓은 자리에서는 취나물이 제법 먹을만하다. 그 밭을 돌아 조금만 올라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가 나란히 있다. 두 분의 묘 주위로 난 고사리는 유난히 토실토실하다. 혹시 우리가 와 꺾어 먹을 걸 아시고 밤새 할머니가 물을 주고 계신 건 아닌가 하는 망측한 상상을 해 본다.      


살아 계실 때 나, 돌아가신 지금에나 할머니는 내 할머니다. 

언니의 할머니이기도 하고, 오빠의 할머니인 걸 당신께서 너무도 자랑스러워하셨지만 사실 우리 둘 사이는 동지애로 끈끈했다. 내 이마는 완전히 할머니를 닮았고, 둘 다 형제 많은 집에 막내였다. 그러니 성질 별난 것도 닮아 서로를 제일 잘 이해했다. 우리 엄마가 생떼 부리는 나를 부지깽이로 죽자고 잡을 때마다 할머니는 치마폭으로 나를 둘러 감싸며, 

‘놔둬라. 나중에 한 놈은 성질머리 잡고 살 놈이 있을 거다. 시집 못 보낼까 싶어 걱정이냐?’ 

하시면서 나를 끌고 나가셨다. 우리 엄마는 그런 할머니 때문에 계집애 성질 버려 놓는다고 원망을 많이 하셨다.


할머니 말씀이 맞았다. 

지금은 어디서 이상한 놈이 나타나 나를 휘어잡고 30년째 살고 있다. 그럴수록 오롯이 내 편, 광주리에 유과를 다 꺼내먹고, 다 부셔놔도 내 편들어주는 내 할머니 같은 사람이 지금 내 곁에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 살기 참 수월하겠다 싶기도 하다.

      

 봄을 뚫고 올라온 취나물을 뜯고, 고사리는 가져간 마대에 담아 두고, 지난가을 풀들에 묻혀 제 난 자리를 못 찾아 포기했던 더덕을 파기로 했다. 봄에만 가끔 나가는 시골 밭에 갖다 둔 연장이란 게 참 빈천하다. 자루가 부실한 삽 한 자루, 끝이 뭉툭한 곡괭이 한 자루. 그리고 호미를 찾아 더덕을 파기로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무슨 금맥이라도 캐러 온 줄 알았을 것이다. 먼저 만만한 장소를 찾아 삽으로 푹 찔렀더니 깊지 않은 더덕이 동강 두 동강이 났다. 삽을 포기하고 호미로 땅을 살살 파기도 하고, 곡괭이로 깊이도 파고, 한 동안 제법 씨름을 하고서야 토막 난 더덕 몇 개와 그나마 씨알 좋은 더덕 몇 개를 보탤 수 있었다. 몇 개 안 되는 더덕이지만 향은 건너 동네까지 날아갈 듯했다.  

그날 부실한 삽자루와 곡괭이는 제 자루를 잃었다.  


짐을 챙겨 차를 집 반대 방향으로 잡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 가는 중간쯤 강을 끼고 유명한 민물장어 집이 있다. 지글지글 불이 오른 잘 익은 장어를 연신 내 그릇으로 담아주시는 어머니 얼굴에 고단하나 행복이 보여서 좋았다.


아버지나 남편, 아이들이 빠진 자리에 어머니랑 단둘이서 입에 맞고, 몸에 좋은 걸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생선 한 마리를 구워도 대가리나, 꼬리 정도가 우리 엄마의 몫이었고, 곰국을 고아도 우리는 큰 그릇에 담아주시면서 당신께서는 작은 국그릇에 그것도 조금씩 담아서 드신다. 나는 곰국같이 쉽게 질리는 음식을 길게 먹는 걸 지나치게 싫어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당신 몫을 아껴가면서 우리 집 몫을 따로 챙겨주시는 일로 매번 둘의 다툼이 인다. 어머니 서운하실 일이고, 나는 애가 타는 일이다. 그런 청승스러움으로 맺어진 모녀가 단둘이서 비싼 민물장어를 먹다니…. (이게 좀 비싸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길에 

 ‘아이고. 열 아들 안 부럽다.’라고 말하는 엄마와 ‘인생 뭐~ 별거 있나?.’라고 말하는 딸, 모녀가 천천히 고향 집 앞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의 줄줄이 딸 낳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문여사님, 내 어머니는 20살에 시집을 와서 딸을 다섯이나 낳으시고. 귀한 아들 하나를 겨우 얻었다. 4대 1일 참 빈약한 승률이다. 빈약한 승률만큼이나 이생의 삶은 고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세가 들고 나서는 부쩍 

 “ 뭐~ 이만하면 됐지. 내가 뭐~” 이런 자족의 넋두리를 자주 하신다. 그렇게라도 위안하며 지내시니 고맙다.     


 문여사 21살에 큰딸을 얻었다. 

 상상도 못 한 산고를 치르고 낳은 첫딸이 젖을 떼자마자 둘째가 들어서 바로 또 딸을 낳으셨다. 무심하시고 살림 손이 매 짜지 못하셨던 우리 할머니는 며느리 산달이 차도 미역을 미리 준비해 놓지는 않으셨으니, 첫딸은 그나마 첫 아이라 미역국이나 따나 먹었다지만, 두 번째 딸을 낳은 날 우리 엄마는 첫국밥으로 허 멀건 된장을 푼 채소 국물을 받아 마셔야 했다. 둘째가 겨우 젖을 뗄 때쯤에 3살 터울로 셋째를 낳았으니 이번엔 아들이었다. 


우리 오빠 귀남 씨. 우리 엄마 생에 최고의 선물로 온 우리 오빠. 


호랑이해 밤 중에 아들을 낳았다고 했더니, 시아버지께서 며느리 방에 들어오시지 못하시고 새벽이 올 때까지 마당에 서성거리셨단다. 그리고는 첫새벽 할아버지께서는 10리 길을 더듬어 큰 미역 다발과 소고기를 끊어 오셨다. 아침 밥상에 뿌옇게 우러난 소고기미역국에 하얀 쌀밥을 고봉을 받는데 그간 설움과 기쁨으로 목이 메 밥이 안 넘어가더라고 하셨다.

 오빠가 음력 7월생이라, 넓은 강이 있는 우리 동네는 사람이 자주 강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첫(?) 손자한테 동티라도 날까 사람 빠져 죽었다는 장소를 피해 상류로 둘러 강 건너 장터에 다녀오셨다며, 지금도 그때 생각이 나는 듯 배시시 웃으신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빠가 태어난 지 삼칠일이 지나도록 미역을 사다 나르시고, 쌀 한 말을 찧어 보리 냄새 밴다고 따로 밥을 지어 며느리에게 갖다 바치라 명 하셨다. 귀한 손주에게 물릴 젖에 보리 냄새날까 염려하신 탓이다. (할배가 진짜 웃긴다) 첫 국밥도 못 얻어먹은 둘째 딸도 그날부터는 고추밭에 터 판 귀한 딸이 되었다.  

    

 그 호강을 경험하고 나니 자꾸 아들을 낳고 싶은 욕심이 생겼단다. 호강을 모를 때보다 한 번 받아본 호강이 훨씬 더 간절해졌지….     


 문여사 복이 그만큼이었는지 그 뒤로 아이가 생겨 낳으니 딸, 그 딸을 잃었다. 왜 잃었냐고 내가 몇 번을 물은 기억은 있으나 들은 대답은 없다. 세월이 50년을 넘게 흘렀어도 어머니에게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먼저 보낸 자식인 듯하다. 태어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젖 뗄 무렵에 보낸 딸에게 어찌 회한이 없을까? 가끔 그 딸이 제일 이뻤노라고…. 먼저 가려고 그렇게 예뻤던 것 같다고 말끝을 흐리실 때가 있다. 세월이라고 해도 없앨 수 없는 기억도 있는 거니까…. 내가 딸을 키워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 딸을 잃고 바로 태기가 있어 추운 겨울에 몸을 풀고 나니 이번에도 또 딸이라 하도 기가 차고 어안이 없어 새벽에 포대기에 싸서 살짝 윗목에 밀어놓았다고 한다. 그때 맘이야 살면 살고, 죽으면 죽어라 싶었다는데 할머니께서 눈치를 채시고는 뭐 낳았냐고 물어도 안 보시고 껍질도 안 벗긴 토란대로 국을 끓여 주시는데 입안에서 아린 맛이 지금도 기억이 나신단다. 한겨울에 그것도 새벽에 아이를 낳았으니 턱은 덜덜 떨릴 정도로 추운데 시어머니는 군불 한 아궁이를 안 넣어 주시더라는 이야기 하시면서 내심 시어머니에 대해 서운함을 내색하기도 하신다. 그것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매정하시지도 않으셨고, 내겐 세상없는 내 편인 사람이었다. 돌이켜 할머니도 오죽 서운하셨을까 싶다. 그 딸이 내 바로 위 언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 형부와 조카들이 제 엄마 안쓰러워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 태어남이 축복이지 못했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이 딸은 엄동설한에 태어났다. 생일이 새해 1월 5일이니 지리산 자락 끝에 있는 우리 동네 그 촌집은 그때 얼마나 더 추웠을까? 그 집에서 애를 낳고 바로 뒷날 아침에 애 낳은 뒤 서답을 빨고 있는데, 윗동네 사시는 큰할머니께서 오셨다가 우물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뒤 서답을 빨고 있는 어머니의 등짝을 철썩 때리시면서 

“아~야. 이게 무슨 짓이고? 애 낳은 여자가 한겨울에 뭔 빨래를 한단 말이고?” 

하시면서 뺏어 대신 씻어 주시는데 눈물이 나더라는 말씀 하셨다. 돌아가신 분이라 지금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하지만, 그때 생각하면 내내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고….     

 딸 낳았을 때와 아들 낳았을 때가 이렇게 다른데 어째 아들 하나 더 낳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겠냐고 되물으셨다.

      

어머니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오빠는 태어나는 그 순간, 어머니께 평생 해야 할 효도를 이미 다 했다 싶다.  존재로 필요충분을 만족해 버린 것. 그것이 어머니와 오빠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오늘같이 따뜻한 봄날 나를 낳으셨다. 내 생일이 봄이 충만한 때이니, 사월의 따뜻한 햇살이 얼마나 눈에 부셨을 터이며, 그 화창함이 얼마나 빛났을까? 그렇게 맑고 밝은 날, 오전 새참을 차리다가 태기가 있어 나를 낳으셨다는데, 어머니는 차라리 그냥 배에 계속 넣어 다닐 걸 싶을 만큼 절망을 또 경험하셨다. 또 딸인데 이젠 하도 기가 차서 눈물도 안 나더라며 그냥 웃으셨다. 나는 우리 어머니에게 깊은 절망의 끝을 경험하시게 하면서 태어난 셈이다. 

     


문여사님은 아이 여섯을 낳아 다섯을 기르셨다. 

그런데 우리 문여사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애를 낳을 때도 첫국밥을 먹을 때도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안 계신다. 늘 아이는 어머니 혼자 방에 들어가서 낳았으며, 아들을 낳을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환호와 수고로움이 있을 뿐이고, 딸을 줄줄이 낳았을 때조차 그들의 노여움과 서운함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문여사 애 낳을 때 어디에 계셨을까? 젊을 때나 나이 들어서나 여전히 겉도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우리 아버지

      

지금도 우리 어머니의 삶은 그 딸들을 줄줄이 낳을 때를 크게 벗어나지 못할 만큼 고단하고 팍팍하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돌아가시고 싶어 얼마 되지 않는 노후 자금에 목을 매며 사시느라 돈에 자유롭지 못하시고, 젊어서부터 맘을 주지 않는 그것까지는 용서하지만 늙어서 몸의 짐만 맡기고 있는 이기적인 남편을 보살피고 계신다. 그게 다일까? 이젠 남편보다 더 이기적인 자식들의 눈치까지 살피셔야 하니 그 고단함이란….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고 사는 나는 어머니의 그 사정을 다 알면서도 그 짐이 내게 옮아 올까 싶어 야박하게 외면하면서 살고 있다. 죄송하고 애잔하지만 지금도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조금 더 지나면 내가 애들 다 키워놓고 어머니한테 잘할게요”

그 말뿐이다. 그때가 되면 나도 또 다른 변명을 찾게 되겠지만….     


그렇게 2012년 봄날을 보냈다.

내년에도 취나물이 나고 고사리가 올라올 때쯤이면 문여사랑 같이 나물을 캐고 고사리를 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고단한 몸에게 장어를 구워 대접하며, 당신의 줄줄이 딸 낳은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는 그날을 기다려 볼 참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2012년의 봄날 하루를 기억한다.      


PS 아버지는 2014년 추석날 생을 달리하셨고, 지금 89세가 된 우리 어머니는 나물을 캐러 시골에도 못 가시고, 일 년에 한두 번 나랑 둘이서 드라이브하며 입에 맞는 것들을 드시며 행복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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