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한 남자를 찾아내다
내가 속한 문예지에서 발간한 책이 택배로 왔다. 원고를 보내달라고 할 때 하도 정신이 없을 때라 별생각 없이 써 놓은 글을 보내었다. 택배 상자를 받자 ‘내가 무슨 글을 보내었지?’ 했고, 이번 글에는 아쉬움이 덜 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결론은 또 아쉬웠다. 왜 매번 나는 아쉽기만 한 지….
글을 오래 써 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글을 보낼 때 몇 번을 수정하고 보낸다. 그런데 막상 책으로 묶여 진 글을 보면 항상 아쉽다. 일단은 컴퓨터 모니터에 보이는 글과 종이에 인쇄된 글과는 차이가 크다. 뭐 종이책이 더 좋다, 안 좋다는 문제가 아니라 인쇄를 해 놓고 보면 좀 더 객관화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러니 내 글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어제 내 손에 온 책에 실린 글은 글의 아쉬움에 더해 남들과 나누기 민망한 옛사랑과의 이별 이야기까지 더해졌으니 다른 때보다 더 난감했고, 일단은 남편이 볼까 민망해 상자째로 책방에 던져두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으니 써 놓고도 숨겨야 할 일이 종종 생기는데…. 하물며 주제가 대놓고 ‘나를 사랑한 남자’라니?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난감했노라 하니, 남편과의 이야기를 풀어보라고 한다. 아이고….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기는 했나? 싶은 맘이 드는 게 확신이 안 선다.
얼마 전 사주를 보러 갔었다. 아이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사주를 보면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온다. 명리학을 공부하신 그분께서 아이한테 자식 운이 한 3년 정도 들어오는데 이런 시기에 배필 될 만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결혼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고 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는 경우보다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오는 시기에 결혼 운이 높다고 한다. 즉 결혼해야 자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주에 자식이 들어올 시기쯤에 결혼이 잘 성사된다는 말이다. 이건 뭐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진짜 호르몬의 장난이거나, 2세를 만나기 위한 절차로 결혼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 말을 듣고나니 내 남편과 나의 만남도 우리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호르몬 또는 운명의 장난이지 아무래도 사랑은 아니었지 싶다.
나만 그럴까?
우리가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시기가 있다. 과연 결혼을 위한 적령기가 있기나 할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결혼 적령기라고 정하는 시기는 아이 낳아 기르기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던가? 그러니 나는 그 시기의 남녀 간의 사랑은 일단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한 끌림으로 본다. (순전히 나의 경우에 한하여) 그 외 나의 삶 속에 나를 사랑한 남자를 찾아야 하니 어렵다. 그리고 없다.
결혼하고 30년째를 맞았다. 그리고 남편과 사이에서 딸 둘을 키웠다. 두 딸을 키워내는 30년 동안 나에게 너무도 데면데면한 남편이지만, 그리하여 내가 남편과 나를 협동조합의 공동대표라고 표현하지만, 세상에 우리 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이란 말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저렇게 냉정하고 계산적인 남자가 어쩐다고 애들한테 저런 호구 같은 짓을 할까, 싶을 때가 많다. 호구도 저런 호구가 없다.
가끔 가족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애들은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자기 아빠한테 여행경비를 다 청구한다. 나한테 꼬장꼬장 비용을 따지고, 가산금이라도 묻어나오는 고지서를 볼라치면 백 만 톤급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어디서 자는지, 뭘 먹는지 묻지도 않는다. 여행지에서도 애들은 자기네 하고 싶은 대로, 자기들 맘대로 아빠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라도 좀 구시렁대긴 해도 그야말로 질질 끌려다닌다. 심지어 자기가 싫어하는 일에도 마찬가지다. 나랑 둘이었으면 차라리 하늘을 두 조각을 냈으면 냈지 절대 하지 않을 일들에도 ‘어라? 순응하네.’ 싶어진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확신한다. 이 세상에 우리 딸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들의 아빠라고….
그래서 나도 정한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낀 사람은 내 아버지였을 것이라고…. 세상의 어떤 위험에서도 책임을 다하셨고, 내가 아무리 속을 뒤집히게 했어도 아버지는 나를 쫓아내지 않으셨다. 남녀가 내외하던 시절의 끝자락에 그것도 지리산이 가까운 산골에서 자란 내가 아버지 등에 업혀 다니고, 아버지의 두 다리 위에서 비행기를 타며 지냈던 기억이 온전하며, 사춘기와 20대의 시절 아버지와 맞서 전쟁터를 지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매를 맞아 본 기억은 없다. 나는 아버지에게 인색하다 대들었고, 아버지는 나를 생각 없다 나무라며, 동·서독의 벽만큼 단단한 벽을 세우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조차 아버지는 나와 함께 다니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나도 아버지와 거리를 멀리하지 않았다. 매우 미워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막상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가장 허전한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고향 친구가 “수야, 너희 아버지는 너를 참 사랑하셨지?”라고 말해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가게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는 아버지 방식대로 나를 참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두 아이를 당신의 방식대로 사랑하듯, 내 아버지도 당신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오셨을 것이다. 다만 우리 둘의 마음이 서로에게 닿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아버지만큼 나를 사랑해 주고 염려해 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주 나는 내가 벌어서 쓰는 돈이 제일 만만하고, 그 다음은 우리 아버지 돈이었다고 말하고 다닌다. 나에게 개 호구였던 우리 아버지. 지금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내가 직장 때려치우고 호떡집이라도 차린다고 하면, 내 앞에서야 나를 잡아 죽이려 드시겠지만, 결국엔 고향 들에 남은 땅이라도 한 평 팔아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닌지 엄마와 의논 할 사람도 집에 있는 내 딸의 아빠가 아니라 돌아가신 내 아버지일 것임에 알기에…. 편모슬하에 50대 후반의 딸은 가슴이 허전하다.
깜깜한 터널인지, 뜨거운 사막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꽃길은 아닌 이 시간을 지나느라 너무 고단하여 상심한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해 준 그 남자(?)가 좀 그립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