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위에 봄이 먼저 왔다.
내가 사는 남쪽 지방에도 눈이 내렸다.
몇 번의 해가 바뀌는 동안 눈 구경 못 하고 지나는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고, 여전히 올해도 눈 구경은 끝났다고 했는데 2월 중순에 이렇게 하얀 눈 세상을 구경하게 될 줄이야….
그래 뭐든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설을 보내고 산이고, 도로변의 나무 끝자락에 물이 오르는 게 보였다. 나무들은 저 남쪽 바다 건너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디선가에서 출발했을 봄의 일정을 미리 알고 제 몸을 움직여 물을 올려놓고 있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갈 때, 출·퇴근길 매화밭을 스칠 때 나는 매번 ‘나무 끝자락에 물이 오르고 있지?’, ‘매화가 피려고 봉오리 커지는 거 보여?’를 말하고, 그네들은 ‘아직은….’이라 답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는 봄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봄이 한창 무르익은 양기가 충만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러니 내 처음 만난 계절은 당연히 달큼한 바람과 유난한 햇살이었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내가 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 정한다. 옛말에 봄볕에는 며느리 내 보내고, 가을볕엔 딸을 내보낸다고 할 만큼 봄볕에 탄 얼굴은 회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봄이 되면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돈다. 얼굴에 기미가 앉으면 어떻고, 좀 새카맣게 그을리면 어떤가? 그런 것들로 짧은 봄이 주는 선물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2월인데 내가 나무를 닮았는지 벌써 봄 맞을 준비로 맘이 바쁘다.
지난 연말 이라크로 나갔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한 달쯤 같이 지냈다. 그 시간 동안 보통의 모녀들이 함께한다는 것들을 다 했지 싶다. 미용실을 다녀오고, 차를 끌고 무작정 나서서 밖에서 자고 오는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사우나를 같이 다니고, 난생처음 아이와 나란히 앉아 네일아트도 받았다. 때로는 내가 계산하고, 자주 아이가 예약해 놓은 자리였으니 이젠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자기 카드를 쓱 꺼내 계산하는 아이를 확인하는 자리는 뿌듯하기도 했다.
미용실이든 사우나는 한 번을 하든 열 번을 하든 내 선택에 따라 정하면 되는 일인데, 네일아트라는 게 한 번 시술(?) 받고 나니 지속해서 관리가 필요한 일이었다. 손톱에서 그 매니큐어를 제거하는 일도, 다시 또 다른 디자인을 해서 붙이는 일도 여간 신간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손톱이 길어 컴퓨터 자판을 칠 때 소리도 크고, 키보드의 다른 칸을 쳐 오타도 많이 났다. 설거지조차 쉬운 일이 아닐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집에서 혼자 뜯어버리자니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업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달이 지나 다시 네일숍을 찾았고, 벗겨낸 자리에 다시 입힐 색을 고르고 있었다.
이젠 봄이다.
손톱을 정리하고 색을 고를 때 꽃잎 색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꽃 피는 봄에 손가락에도 매화가 피었으면, 진달래가 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고르는 색이 자꾸 꽃분홍이다. 아이는 손가락에 검은색도 올리고, 프렌치라고 손가락 끝에만 살짝 색을 넣기도 하더니 나는 그런 색에는 눈길도 안 갔다.
붉은색을 골라 물감이 번지듯 하는 방법으로 손톱에 물을 들여달라고 해 놓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앞에서 디자이너는 내 못생긴 손톱을 붙잡고 애를 쓰고 있는데 나는 꾸벅꾸벅 졸았으니…. 어쨌든 그렇게 내 손톱에 한 잎 한 잎 붉은 꽃잎이 올려졌고, 완성해 놓으니 좀 과하다 싶은 붉은 꽃잎 10장이 피었다. 봄꽃이라 하기엔 좀 과하다만 그래도 괜찮다. 봄에는 매화도 있지만 도화살 충만한 복숭아꽃도 피는 거니까
나무도, 나도 이렇게 열심히 봄 맞을 준비를 다 끝내고 있는데 뜬금없이 눈이 내려 기운을 확 꺾어놔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나는 다음 달에는 또다시 손가락 위에 풀잎이든 꽃잎이든 올려놓을 것이다.
아참. 나랑 같이 놓아주던 딸아이는 더운 나라로 일자릴 구해 내일이면 떠난다. 물설고, 낯선 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느라 내 걱정까지 할 여력이 없을 아이와 달리 나는 꽃이 핀 손가락만 내려다보며 그리운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싶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다 보면 결국엔 의미 있음에 닿게 된다는 걸 쉬면서 늘 깨닫게 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