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by 조지오웰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본능이란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일하는 학원에서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다. 그리고 읽고 난 후 이야기 속 가고 싶은 나라를 선택하고 그 이유에 대한 글을 써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반 이상의 학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소인국 릴리펏에 가고 싶다는 글을 썼다. 이유는 동일했다. 상대적으로 소인국 사람들보다 몸집이 크기 때문에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고 그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힘과 권력에 대해 아직 명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았을 12살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대상을 찾고 그들을 먹이 삼아 자신의 영달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하물며 닳고 닳은 어른들은 말해 무엇하랴.
소설 동물농장의 돼지 스노볼과 나폴레온은 동물들의 정당한 대우와 자유 보장이라는 선의로 혁명을 선도했고 성공했다. 인간세계에서도 현실의 부조리함을 심판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자들이 혁명을 주도한다. 대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혁명가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 그리고 결국 호랑이를 잡는 데에 성공한다. 온 힘을 다해 혁명을 도왔던 수많은 대중들은 혁명가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혁명가는 자신에게 힘을 모아준 대중들에게 감사하며 그들 앞에 펼쳐질 핑크빛 미래를 장담한다. 대중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인생의 해피엔딩을 그려본다. 하지만 현실에서 해피엔딩으로 1부가 끝난 후 평화롭게 2부가 흘러가는 경우를 본 적이 있나? 동물농장에서도 인간 존스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혁명가 돼지 스노볼이었다. 호랑이가 없어진 굴에 여우가 왕이 된 것이다.
진정으로 동물농장의 모든 동물들을 위한다면 호랑이굴 자체를 없애버려야 한다. 하지만 스노볼은 동물들의 자유를 위해 호랑이만 제거할 뿐 호랑이굴을 무너뜨리진 않는다. 오히려 호랑이의 뒤를 이어 지배형식을 더 공고히 할 뿐이다. 혁명이 끝나자마자 지도층 스노볼은 자신의 안위를 슬며시 챙긴다. 전보다 더 동물들의 자유와 능동성을 박탈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른 동물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시선을 외부로 돌린다. 언제든 인간은 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암울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위협한다. 동물들이 의심을 하거나 반문을 하면 지도층은 교묘하게 동물들의 눈을 가려버린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게 한다. 그렇게 선별된 팩트만 보게 되면 동물들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지배층의 눈으로 보게 되며 결국 피지배층 동물들은 그들의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한편, 지도층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난다. 처음 뜻을 같이 했던 동지는 어느새 내 자리를 위협하는 적이 되어버린다. 초심은 사라진 지 오래다. 모두를 향했던 시선이 현재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향하고 있다.
동물농장은 레닌 스탈린의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풍자소설이다. 하지만 소설 속 동물들이 겪고 있는 모든 부조리함과 모순은 작금의 대한민국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현실의 많은 기득권층은 스노볼과 나폴레온처럼 변질되어 있다. 혹시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설계했던 것일까. 일부는 그럴 수 있겠지만 대다수 기득권층의 초심은 순수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사탕을 맛본 순간 그 달콤함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쏟아지는 잠에도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현실에서의 대중은 동물농장의 피지배층 동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동물농장에서는 속절없이 지배층으로부터 농락을 당하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행동하지 않는 자만이 존재했지만, 인간 중에는 깨어있고 행동하는 소수가 존재한다. 소로는 시민불복종이라는 책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효모와 같다고 했다. 빵을 만들 때 효모는 아주 극소량 사용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빵을 부드럽고 먹음직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현실에서는 소수의 사람이 그 시대의 또 다른 혁명가가 되어 사회를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중은 권력을 감시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혁명가 스스로가 권력의 단맛을 멀리해야 한다. 본능은 없앨 수는 없지만 감시와 반복된 훈련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가능한 영역이다. 권력이라는 본능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내면의 혁명 스위치를 항상 ‘ON’의 상태로 두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