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아웃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 중, 드니 라방은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듯 질주한다. 그 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질주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간다.
한재림의 '우아한 세계' 중, 송강호는 TV 속 행복이 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라면 그릇을 엎는다. 그 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혼자 남은 방을 되돌아보며 엎지른 라면 그릇을 스스로 치운다.
일탈, 그리고 돌아오는 일상.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질주하는, 아니 저지르는 분풀이 이후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완벽한 무언가를 갈구하는 인간의 천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임으로, 그 일상 속 어떤 환상은 다시 만들어질 테다. 그러나 더 이상 그 환상은 꿈에 그리던 완벽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다른 모양으로. 다른 모습으로.
돈이 생겼으니,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지만 생활은 여전히 빡셌다.
라라잡으로 이직 후에도 바쁘게 살았다. 사이드 프로젝트와 스터디를 병행하며 회사에서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동네알바를 구축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앞서 간 사람들과의 빈틈을 메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환상에 가까웠던 '디자인'이라는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여전히 남들이 한다는 건 다 하려고 했다. 그중 우선순위가 낮은 관계들에 대해선 당연한 듯이 매몰찼다. 지난 프로젝트, 친구, 가족 순으로 관심이 없었다. 내게 이것은 살아남는 문제라는 엄숙한 핑계가 있었다. 꽉 찬 일상을 유지했던 동력은 가열찬 스트레스와 카페인과 알코올이었다. 유일한 해방구는 운동이었다. 1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쉼은 없었다.
위태로웠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상을 당했다.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다. 운동을 못하게 된 사건은 생각보다 컸다. 내겐 잠시라도 생각을 멈출 수 있었던 시간이 박탈된 셈이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일상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생각하지 않아도 됐던 불순물들이 물 밀듯이 들어오자, 커리어를 손에 쥐고자 기획되었던 일상을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햇빛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방향을 알 수 없는 길가에 서있는데,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내가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출근은 물론) 모르겠더라. 나를 걱정해 저녁에 만나주기로 한 친구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뜸 화를 냈다. 나는 지금 길을 모르겠는데, 데리러 오지 않을 거면 날 왜 걱정하는 거냐고.
야 씨발, 너네는 부자 아냐? 나를 알아?
화는 며칠간 이어졌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내 말도 안 되는 분노를 던져 깨트렸다. 가난이 병인 양이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커리어는 나의 자격지심을 대변하는 듯이 갈피를 못 잡고 무너지는 듯 보였다. 결국, 나는 없는 연차를 끌어다 강제로 쉬며 치료를 받았다. 디자인을 시작하며 맛 본 첫 쉼. 동네알바 MVP 출시를 목전에 둔 시기였다.
짧으면 짧았고, 길면 긴 쉼이었다. 벼락이 내리치고 무너진 나를 돌봐야만 했던 그 기간의 세세한 순간은 사실 기록 외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공유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숙명이었다. 외딴곳으로 질주했던 나는 결국 돌아가야 했다. 아니 먹던 그릇을 던져 깨트렸던 나는 되돌아가기 위해 그 깨진 파편을 치워야 했다. 또한 되돌아갈 일상은 달라야만 했다. 다른 모양과 모습으로.
새로운 일상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결핍을 강요하는 방향이 되어선 안될 것이다. 새로운 일상은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회사 사람들에게도 더욱 튼튼한 안정감을 선사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회사 사람들은 어쩌나. 그들은 생업을 걸고 MVP 출시 바로 직전, 갑작스러운 나의 '병가'를 기다려주었다. 나는 변화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 일상은 어떻게 다시 조직될 수 있을까. 나는 팀원으로 살기로 했다. 멋진 서비스와 더불어 멋진 팀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던 당시 팀원들이 복귀한 나에게 던졌던 따뜻한 한마디들이 떠오른다. 수아님, 걱정했잖아요. 점심은 뭘 먹을까요? 나는 부끄럽게도 이제야 깊은 우물 속에서 빠져나왔건만, 팀원들은 불가피한 교통사고를 당해 아주 잠깐 없던 사람처럼 나를 자연스레 받아주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이렇게 스스로 와장창 깨졌던 경험을 온 지면에 자랑할 수 있으리라. 죄송해요. 저 사실 그때 되게 음침했었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추억합니다.
놀랍기 그지없었다. 잠깐만, 내가 팀원이라고? 이렇게 계산적이었던 나도 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그저 고용된 사람이 아니었어? '팀'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껏 간과했던 사실은 무엇인가. 비로소 이런 사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이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디자인하는가.
당시 나는 일단 모든 생활의 '사이드'를 청산하고, 내게 주어진 동네알바 MVP를 론칭하는데 집중했다. 주어진 서비스에 최선을 다해 부족한 그래픽과 플로우를 채워가며 팀원들과 내정한 일자를 맞춰갔다. 지금 생각하면, 부족한 스킬로 심지어 월급을 받으며 될 만한 아이템에 온 힘을 쏟을 수 있었다는데 무척 감사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은 다른 모양과 모습이 자리를 잡아갔다. 홀로 잘 나가기 위해 오늘의 과업에 복무하던 내가, 팀 다운 팀에 팀원이 된 모습으로.
종착지도 모르는 별세계를 그리며 잠을 줄였던 김수아는 다시 '디자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환상이 깨진 백지에서 일상을 새로 그리는 셈이었다. 그 백지에 다시 썼던 디자인은 비단, 전부 돈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 첫 서비스, 동네알바를 론칭했다.
Only Lovers Left Alive
* 사랑이 아니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제 좌우명이에요.
동네알바, 알바 구인구직 시장을 혁신한다
* 제가 만들어가는 서비스를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주문이에요.
글에 대한 피드백, 질문, 티타임은 언제든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