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 그리고 아련함

by 은기

태준과의 이별로 깊은 슬픔을 앓고 난 후,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 떠났던 태국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돌아온 지수에게 익숙한 일상으로의 복귀는 한 달 만에 찾아온 힘겨운 과정이었다. 푸껫의 뜨거운 햇살과 그곳에서 만난 현우의 따뜻한 미소는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하게 해주었던, 멀리 떨어진 기억의 조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그의 연락처를 묻지 않은 것에 대한 희미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기말고사 기간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수의 발목을 잡은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였다. 태준과 만나는 동안, 그의 예측 불가능한 일정과 즉흥적인 만남에 휘둘리며 소홀했던 공부는 고스란히 짐이 되어 돌아왔다. 견고하다 믿었던 그녀의 학업 계획은 자꾸만 흔들렸고, 그 결과 성적은 바닥을 쳤었다. 이제 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었다. 밀린 전공 서적들은 책상 한 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복잡한 수학 이론들은 마치 그녀를 비웃는 듯 어렵게만 느껴졌다.

지수의 일상은 다시 도서관과 강의실이라는 좁고 익숙한 공간들로 채워졌다.

매일 아침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쥐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집중하려 애쓸수록,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태국에서의 잔상들이 파고들었다. 복잡한 미분 방정식을 풀다가도 문득 짜뚜짝 시장의 활기찬 소음과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했고,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학 증명에 매달릴 때면 푸껫 해변의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일정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아련하게 맴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의 중심에는, 언제나 현우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왔을까?’

공부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들 때, 창밖으로 닿을 수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심지어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뒷모습 속에서도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일렁였다.


기말고사 기간은 문자 그대로 전쟁이었다. 밤샘은 기본이고, 도서관 불이 꺼질 때까지 남아 문제를 풀고, 이해되지 않는 이론 하나를 붙잡고 씨름하기를 반복했다.

며칠 밤낮없이 이어지던 사투가 끝났을 때, 지수에게는 밀물처럼 해방감이 밀려왔지만, 그 뒤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운과 왠지 모를 허탈감이 자리했다.

치열했던 학업 전쟁이 끝난 후, 일상은 다시 비교적 평온한 궤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태국에서의 짧았던 일탈과 그곳에서 만난 현우라는 존재는 여전히 지수의 마음속에 깊은 잔상으로 남아, 그녀의 생각과 감정 곳곳에 스며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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