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의 일주일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 지나간 꿈만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현우와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쌓았던 기억들은 지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팡아만의 신비로운 풍경, 함께 노를 저을 때 주고받았던 미소, 그리고 별이 쏟아지던 밤하늘 아래 나누었던 진솔한 이야기들까지. 그 모든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수는 문득, 서로 연락처 하나 묻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그곳에 고이 남겨두는 것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그는 힘든 시간을 견딜 힘을 잠시 빌려준 고마운 사람이자, 기억 속에서 영원히 빛날 아름다운 여행의 한 부분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애써 여행의 여운을 뒤로 밀어내고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과거 태준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짧은 일탈이 준 긍정적인 에너지 덕분인지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더 단단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지수는 가장 먼저 친한 친구 설아에게 연락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훌쩍 떠나버렸으니, 설아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눈앞에 선했다. 학교 앞 단골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예상대로 설아가 약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야, 최지수! 너 진짜 뭐야?” 설아의 첫마디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지수는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미안… 갑자기 결정한 거라 연락할 정신이 없었어.”
"그럼, 태국 가서라도 했어야지! 너는 왜 가끔씩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돌발행동을 하냐고!” 설아는 잔뜩 토라져 있었다.
"미안… 정말 미안해.” 지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설아는 한참을 쏘아보듯 타박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 됐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어. 그래서, 태국은 어땠는데? 그 바람둥이 생각은 좀 잊고 왔냐?”
설아의 돌직구 질문에 지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바람둥이'… 그건 태준을 설명할 때 그녀의 친구들이 가장 자주 쓰는 단어였다.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태준의 성격은 종종 '바람기'로 발현되었고, 지수는 그에게서 가장 상처받은 부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음… 좋았어. 바다도 예뻤고… 그냥 혼자 생각할 시간도 갖고.” 지수는 현우 이야기를 차마 꺼낼 수 없어 말을 아꼈다. 아직은 그녀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비밀이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라니?” 설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난 네가 태준이랑 사귀는 거 이해가 안 갔어. 너랑 걔는 너무 다르잖아. 너는 이렇게 현실적이고 똑 부러지는데, 태준이는 맨날 꿈만 꾸는 것 같았고.”
설아의 가감 없는 말에 지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설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자신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처럼 예쁘고, 공부 잘하고, 성격 좋은 애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애한테 매달렸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니까. 다른 괜찮은 애들 다 마다하고 제일 별 볼 일 없는 애한테 빠져서… 사귀는 내내 마음고생만 하고!”
설아는 속이 터지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친구의 진심 어린 답답함과 속상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지수는 더욱 미안해졌다.
그녀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기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지수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빛났어. 걔가 가진 음악에 대한 열정,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자유로운 에너지… 그런 게 좋았나 봐. 아마 나랑 너무 달라서 끌렸던 것 같기도 하고.”
설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수야, 난 네가… 다음에는 너랑 마음이 통하고, 다른 누구보다 너만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설아의 진심이 담긴 말에 지수는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문득 태국에서 만났던 현우가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일지도 몰랐다. 설아와의 대화는 지나간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은 아르바이트를 마친 친구 연주를 만나기 위해 학교 근처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한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연주가 환하게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맞았다. 연주는 설아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친구였다.
지수와 설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연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지수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야, 최지수! 연락 한 통 없이 해외로 튀는 스케일 좀 보소! 정말 어이가 없네!”
연주의 목소리에는 황당함과 유쾌한 질책이 뒤섞여 있었다. "미안… 미안해.”
지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두 친구의 연이은 ‘잔소리 폭격'에 지수는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연주는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더니, 장난기를 거두고 지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자, 솔직히 말해봐. 이번 슬픔은 최소 며칠 각이야?”
연주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지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번 슬픔'. 연주는 지수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유독 취약하고, 한번 빠지면 깊고 길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수에게 슬픔은 단순히 느껴지는 감정을 넘어, 그 무게가 다른 무엇보다 무겁게 다가왔고, 그 복잡한 구조를 끈질기게 파헤치고 완전히 이해해야만 비로소 벗어날 수 있는 난제와 같았다.
마치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앞에서 밤새도록 씨름하듯, 슬픔의 본질을 파고드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더디기만 했다.
"이번에는… 글쎄…” 지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녀 자신도 이번 슬픔이 얼마나 오래 그녀를 붙들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태준과의 이별은 과거 어떤 관계보다 깊은 생채기를 남겼고, 그 상처는 아직도 건드릴 때마다 아릿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제발 좀 빨리 털고 일어나자, 응? 너 슬픔 앓는 거 옆에서 보고 있으면 우리가 더 속이 터져 죽겠다니까.” 연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마음을 토해냈다. 친구들의 따뜻하지만 매서운 잔소리에 지수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감정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친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은 그녀의 의지대로 쉽게 조절되지 않는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