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지수는 학과 교수님의 안식년 기념 모임에 초대받았다.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오랜만에 선배들도 만날 겸, 설아와 연주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모두 기꺼이 참석하기로 했다. 모임 장소는 학교 근처의 한 호텔 연회장이었다. 익숙한 캠퍼스를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열리는 행사가 왠지 모르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활기찬 분위기가 후끈하게 지수를 감쌌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 선후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설아, 연주와 함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끌벅적한 이야기 소리가 가득했다. 방학 동안의 근황, 새 학기 시간표 등 시시콜콜하지만 정겨운 이야기들이 오가며 웃음꽃을 피웠다. 복잡한 수학 이론과 씨름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이 시간이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속에서, 지수는 문득 연회장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을 훑어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훤칠한 키에 세련된 캐주얼 정장 차림. 방콕의 짜뚜짝 시장에서 길을 안내해주고, 푸껫에서 함께 카약을 탔던 바로 그 남자, 현우였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태국에서 보았던 그 편안하고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한국, 그것도 자신의 학과 교수님 안식년 기념 모임에서 현우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전혀 예측하지 못한, 기적 같은 우연에 지수는 얼떨떨했다.
현우 역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고개를 돌리다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 짧은 놀라움이 스쳤지만, 이내 환한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 지수에게 다가왔다.
"지수 씨?” 현우의 목소리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지수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현우 씨가 여긴 어떻게…?”
"제가 교수님께서 단장으로 계신 CTS(Community Through Service) 회원이거든요. 오랜만에 교수님과 선배님들을 뵐 겸 참석했어요.” 현우는 예상치 못한 재회에 신기하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세상 좁네요. 태국에서 우연히 만나고, 한국에서 이렇게 다시 뵙다니.”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놀라움과 묘한 반가움이 감도는 침묵이 흘렀다. 짜뚜짝 시장의 혼잡함 속에서 시작된 인연, 푸껫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깊어진 친밀감. 그리고 한국의 일상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극적인 재회. 마치 운명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만 같았다.
"근데 지수 씨는… 아직 학교 다니세요?” 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수학과 2학년이에요. 현우 씨는요?”
"저도 아직 학생이에요. 휴학했다가 이번에 건축학과 4학년으로 복학하고요.”
현우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동문이었네요. 그것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니.”
서로 같은 학교 동문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실에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낯선 타지에서의 만남에 이어, 한국에서는 같은 캠퍼스를 공유하는 사이였다니.
지수의 평범한 일상 속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불쑥 들어온 순간이었다.
"괜찮으시면,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실래요?” 현우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지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연회장 구석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정말 신기하네요. 지수 씨랑 저랑 동문이라니.”
"그러게요. 이런 우연이 정말 있네요.” 지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대답했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이 흘렀다. 태국에서의 편안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정장 차림의 현우는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국 여행은 잘 마치셨어요? 푸껫에서는 계속 즐겁게 지내셨고요?”
"네, 덕분에 잘 보내고 왔어요.”
"다행이네요. 태국에서 길 잃고 당황해하던 지수 씨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때 제가 못 도와드렸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죠?” 현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말 그때 현우 씨 아니었으면 아직도 짜뚜짝 시장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농담을 주고받으며, 태국에서의 추억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낯선 땅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웃고 이야기했던 시간. 그것은 단순히 즐거운 여행의 추억을 넘어, 지수에게는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살아갈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연락처도 몰랐던 두 사람이 이렇게,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지수는 이 믿기 힘든 재회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묘한 설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현우는 그런 지수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 돌아와서는 어떠셨어요?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의 따뜻하고 예리한 질문에 지수는 순간 울컥했다. 태국에 갔던 진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우는 그녀의 힘든 마음을 어렴풋이, 혹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음…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지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연회장의 기념식 마무리 단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아쉬움이 남을 터였다.
현우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국에서 지수 씨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고 헤어진 거, 한국 와서 많이 후회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연락처 교환할 수 있을까요?”
지수는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현우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현우 또한 자신의 번호를 지수에게 저장해주었다.
"이제는 연락할 수 있겠네요.” 현우의 얼굴에 진심 어린 기쁨이 번졌다.
학과 교수님 안식년 기념 모임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이 세 번째 재회는 지수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순간으로 깊이 새겨졌다. 낯선 타지에서 우연히 만났던 인연이, 한국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동문임을 넘어 이제 막 그녀의 일상 속으로 성큼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시련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맺어진 관계가,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가슴 뛰는 설렘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 세 번째 만남은,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적인 운명의 이끌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