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의 안식년 기념 모임이 끝나고, 지수는 설아, 연주와 함께 연회장을 나섰다. 호텔 로비에 서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지수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전 헤어진 현우 생각으로 가득했다.
세 번째의 우연, 같은 학교 동문, 그리고 연락처 교환이라는 믿기 힘든 현실 앞에서 심장이 여전히 두서없이 두근거렸다.
연회장을 나와 로비에 서자마자, 설아가 지수의 팔을 툭 치며 현우가 서 있는 쪽을 턱짓했다.
"야, 최지수. 아까 저 사람 누구야? 너 아는 사람이야?” 설아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호기심이 번뜩였다.
연주 역시 옆에서 현우를 힐끔거리며 궁금증을 숨기지 못했다. 친구들의 집중 포화에 지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아까 그 사람… 태국에서 만났던 사람이야.”
지수의 말에 설아와 연주는 거의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태국에서 만났던 사람? 그 바람둥이 때문에 너 혼자 태국으로 도망치듯 갔을 때?” 연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흥분하여 되물었다.
"응… 근데 여기서 다시 만났어. 알고 보니 같은 학교 선배더라고.” 지수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 우연을 가능한 한 덤덤하게 설명했다.
"대박! 너 뭐야?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어!” 설아가 소리치듯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너 우리한테 하나도 빼놓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연주 역시 흥분해서 거들었다.
설아와 연주는 현우와의 드라마틱한 재회 스토리에 잔뜩 흥분하며 지수를 이끌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자리를 잡자마자 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현우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태국에서는 어땠는지, 그때 지수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둘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은지까지.
지수는 친구들의 재촉에 태국에서의 에피소드와 현우의 따뜻함, 사려 깊었던 모습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제 연락처도 교환했으니깐, 연락오겠지?” 연주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야. 아무 생각 하지 마. 연락 오면 무조건 만나.” 설아도 옆에서 거들며 지수를 부추겼다. 친구들의 과장된 듯하지만 진심 어린 반응 속에서 지수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들로 뒤엉켰다. 잠시 망설이던 지수는 솔직한 마음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 태국에서 만났을 때도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고,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너무 신기하고… 현우 씨한테 좋은 느낌 받은 거 맞아.
근데… 예전 일 때문에… 다시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게 좀 두려워.”
지수의 진솔한 고백에 설아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졌다.
"지수야,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태준이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누가 모르겠어? 근데 현우 선배는 태준이랑 정말 다를 수도 있잖아.” 연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맞아, 지수야.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어쩌면 이게 네가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행복해질 기회일 수도 있어.”
친구들의 따뜻한 이해와 진심 어린 응원에 지수의 마음속 무거움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과거의 아픔이 마법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현우라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인연은 상처로 움츠러들었던 그녀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시작해 볼 용기를 조금이나마 불어넣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지수는 마치 중요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현우 선배에게서 언제쯤 연락이 올까? 아니, 정말 연락이 오긴 할까?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머리로는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마음은 이미 현우의 이름 석 자에 온통 쏠려 있었다. 휴대폰 화면이 잠시라도 꺼지면 괜히 불안해져 다시 켜보기를 반복했고, 혹시나 메시지 알림음이라도 놓칠까 싶어 소리 모드로 바꿔두고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휴대폰을 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 날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흘러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기다리던 현우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솟아올랐던 설렘은 어느새 초조함으로 야금야금 변해갔다. '혹시 나 혼자 너무 앞서 나갔나?', '그냥 예의상 번호만 교환한 걸까?'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사실들이 뼈아프게 느껴지며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틀째, 사흘째… 현우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초조함은 이제 희미한 실망감으로 바뀌어가는 듯했다. 지수는 애써 그의 생각을 떨쳐내고 다시 일상으로 파고들려 노력했다. 밀린 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려 애썼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현우라는 선명한 잔상이, 그리고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아주 작은 기대감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나흘째 오후, 지수는 학교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복잡한 <엡실론-델타> 논리에 파묻혀 해석학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지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발신자는 ‘현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막상 받으려니 손끝이 떨려왔다. 몇 번의 진동이 울리는 동안 망설이다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수 씨? 안녕하세요. 현우입니다.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그의 목소리는 태국에서 들었던 것처럼 따뜻했고, 약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듯했다.
"아, 네, 괜찮아요. 현우 씨도 잘 지내셨어요?” 반가움에 지수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들떴다. 눈앞의 해석학 교재는 이미 저 멀리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지수 씨도 잘 지내셨고요? 저번 모임에서 뵙고 바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좀 늦어졌네요.” 현우는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수가 다음 말을 고를까 고민할 즈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수 씨, 수학과 3학년 올라가신다고 하셨죠?”
"네… 현우 선배는 복학 준비 잘 되어가세요?”
"네, 뭐 정신없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수 씨도 이제 3학년 되시면 전공 심화로 들어가서 더 어려워지겠네요?”
"네. 그래서 미리 준비도 할 겸 지금 도서관에 와 있어요.”
"학교 도서관이요?”
"네…”
"아! 진짜 아쉽네요. 저도 도서관에 있다 나온 지 한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조금만 더 늦게 나왔으면 지수 씨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현우는 약간 투정 어린 말투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수는 현우의 귀여운 투정에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수 씨는 수학과에서 어떤 분야 공부하고 싶으세요?”
지수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수학 분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현우는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궁금한 점들을 질문했고, 그의 순수한 호기심에 지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건축과 수학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였지만, 무언가에 대한 깊은 열정을 이야기하는 서로의 모습은 분명 강한 인상을 남겼다. 같은 캠퍼스에서 각자의 꿈을 키워나갈 '동문'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아니면 태국에서 쌓은 특별한 추억 때문인지, 처음 걸려온 전화 통화인데도 어색함 없이 편안함이 감돌았다.
대화는 이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이야기로 흘러갔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점심은 무얼 먹었는지, 주말에는 뭘 할 계획인지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들이 오갔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이 순간이 왠지 모르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수 씨… 태국에서도 짧게 만났고, 저번 모임에서도 제대로 이야기 못 나누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실래요? 편하게… 둘이서요.”
현우가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낸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의 입에서‘데이트 신청'이라는 단어만 없을 뿐, 이건 명백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직접 들으니 심장이 정말 터져버릴 것 같았다. 동시에, 과거의 아픔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람기 많았던 전 연인에게서 겪었던 불안과 불신, 혼자 남겨졌을 때의 깊은 슬픔까지.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순간적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혹시… 제가 너무 갑작스러웠다면 죄송해요. 부담스러우세요?” 현우는 지수의 침묵에 걱정스러운 듯 덧붙였다.
현우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심과, 어쩌면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미묘한 불안감이 지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치 태국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길을 안내해주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그는 과거의 상처라는 마음속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요, 부담스럽지 않아요. 저녁 같이해요.”
지수의 대답에 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밝아졌으며, 안도감과 감추기 힘든 기쁨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정말요? 아, 잘됐다! 제가 맛있는 곳으로 알아볼게요. 지수 씨 편한 날짜 알려주세요.”
"네…”
통화를 마친 지수는 휴대폰을 가슴에 꼭 쥐고 도서관 벽에 기대섰다. 얼굴에는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현우 선배와의 첫 전화, 그리고 마침내 성사된 첫 데이트 약속. 시련의 아픔을 잊기 위해 도망치듯 떠났던 여행에서 만난 기적 같은 인연이, 같은 학교 동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넘어 이제 그녀의 일상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아팠던 지난 사랑의 어두운 그림자가 마음 한구석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현우라는 새로운 설렘이 그 자리를 조금씩, 그리고 분명하게 채워나가고 있음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