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닿지 않는 마음

by 은기

지수와 현우는 격렬한 다툼 후,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돌아섰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매일 주고받던 메시지는 ‘잘 자’ 한마디로 뚝 끊겼고, 한밤중에 이어지던 달콤한 통화도 끊겼다.

지수는 혼자 있는 밤마다 현우와의 대화를 되새겼다.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토로했을 뿐인데, 현우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며 상처받았다고 했다. 지수는 현우가 민서 선배의 행동들을 단순한 배려라고만 치부하는 것이 서운했다. ‘오빠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민서 선배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나에게 먼저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 지수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도, 현우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 깊은 서운함에 빠졌다. 불안과 서운함은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밤마다 현우의 연락을 기다리며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고, 얕은 잠마저도 불안에 시달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는 지끈거렸고,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듯 입맛이 없어 겨우 몇 숟가락 뜨다 수저를 놓기 일쑤였다.

수업 시간에도 현우와 민서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아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며칠 사이 부쩍 야윈 지수의 얼굴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그늘이 드리워졌다.

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민서에게 사심이 없었기에 지수의 질투가 터무니없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현우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내비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지수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런데 지수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고, 민서의 행동만 보고 자신을 의심했다. 현우는 지수가 자신을 향한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 더 흔들리는 것 같아 깊은 상실감에 괴로워했다. ‘정말 우리 관계는 겨우 이 정도였던 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과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던 밤, 현우는 결국 지수의 집 앞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지수의 자취방 앞에 도착하자,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또 싸우게 될까 두려웠고, 지수가 자신을 보면서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까 봐 무서웠다. 현우는 한참 동안 굳게 닫힌 지수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창문은 마치 닫혀버린 그녀의 마음 같아 보여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현우는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한 채 지수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로에게 닿지 않는 마음은 두 사람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현우는 지수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민서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 두 사람의 사랑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후, 학교 축제가 열렸다. 활기 넘치는 음악 소리, 맛있는 음식 냄새, 그리고 웃음소리가 가득한 분위기였지만, 지수의 마음은 무거웠고 현우에게 지수가 없는 축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수는 현우와의 다툼 이후 축제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화려한 불빛과 떠들썩한 음악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지수는 인파를 피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며칠째 손에 잡히지 않던 전공 서적을 멍하니 펼쳐 놓고,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현우는 축제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동아리 방에만 앉아서 작업에 몰두했다. 팀원들이 함께 축제에 가자고 권유했지만, 현우는 "나중에 갈게, 먼저들 가 있어.” 라는 말만 반복하며 그들의 권유를 피했다. 지수와 함께하지 않는 축제는 현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동아리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지수의 절친인 설아와 연주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혼자서 뭐 하세요? 지수도 혼자 도서관에서 청승 떨고 있던데…

제가 지수 데리고 잔디광장으로 갈 테니 선배님도 오셔요.….” 설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마워.” 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연주와 설아는 동아리방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열람실 한쪽 구석에 있는 지수를 발견하고 설아가 가볍게 말했다.

"지수야! 축제인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연주 역시 "밴드 공연 대박이라는데! 너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라며 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지수가 기운 없이 말했다. 설아와 연주는 지수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싸주면서 재촉했다. 지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들을 따라나섰다. 셋은 잔디광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는 인디 밴드의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연주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인파를 뚫고 명당을 차지했다.

"지수야, 설아야, 이쪽으로 와!”라며 큰 소리로 그 둘을 불렀다. 설아와 지수는 웃으며 그곳으로 향했다.

한편 현우는 지수를 보기 위해 재활이 끝나지 않은 다리로 잔디광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공연을 보기 위해 삼삼오오 잔디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지수는 현우 오빠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오빠는 보이지 않고 근처에 민서 선배와 팀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오빠가 민서 선배와 함께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빠 혼자 동아리방에 있을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때 저쪽에서 현우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수는 ‘아직 다리도 안 나았는데 뛰면 어떡해…. 정말 속상해서…' 하며 현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는 잔디광장에서 두리번거리다 지수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금 지수를 보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걱정스러웠지만 지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지수야…”현우는 지수 곁에 가서 나지막이 불렀다.

"어머! 선배님… 안녕하세요? 공연 보러 오셨어요? 여기… 지수 옆에 앉으세요.

지수야, 너도 이젠 그만 두리번거리고 앉아.

연주와 나는 먹을 것 좀 사 올 테니 둘이서 자리 맡고 있어.”

설아는 연주의 손을 잡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지수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현우와 나란히 앉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우는 지수를 바라보며 "얼굴이… 안 본 사이에 안됐네… 어디 아파?”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안 아파.… 입맛이 없어서… 잘 챙겨 먹지 않아서 그런가 봐.”

"…속상하게… 잘 챙겨 먹고 다니지…”

"…이 참에 다이어트도 하고… 좋지 뭐…”

"네가 뺄 살이 어디 있어?…정말 속상해 죽겠다.” 현우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며 얼굴을 매만졌다. 지수는 현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현우는 말없이 한동안 지수를 바라보다가 "지수야, 우리… 공연 끝나고… Fansome 갈까? 너 거기 음식 좋아하잖아.” 지수는 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설아와 연주는 술과 안주를 한가득 사 가지고 돌아왔다.

"선배, 여기 술이랑 안주요… 여러 가지 사긴 했는데 선배가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지수가 좋아하는 것으로 샀어요. 근데 아직 다리가 불편해서 술은 먹으면 안 되는거 아녜요?” 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깁스도 풀었고 지금은 재활운동 중이라 조금은 먹어도 돼.”

"다행이네요. 근데 언제까지 재활운동을 해야 하는 거예요?”

"뛰는 것만 무리하지 않으면 된다니까 이번 달이면 끝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공모전 준비로 운동을 게을리했더니 좀 오래 걸리네.” 현우의 대답을 듣고 지수는 좀 전에 뛰던 모습이 생각나서 "좀 전에 뛰어 오던데… 다리 괜찮아?” 걱정스럽게 물었다. 현우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지수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어느덧 잔디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축제 메인 무대에서는 초대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강렬한 음악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무대 위에는 밴드 멤버들이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보컬은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신나게 몸을 흔들며 공연을 즐겼지만, 지수는 곁에 있는 현우가 신경 쓰여 머뭇거렸다. 현우는 그런 지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제야 지수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밴드의 리듬에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 현우는 공연보다는 그런 지수의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고, 이 시간을 만들어준 지수 친구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신나는 밴드 공연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보컬은 노래를 마무리하고 밴드의 구성원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함성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고 밴드 멤버들은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보답하기 위해 더 열정적으로 각자의 악기를 연주했다. 그때, 보컬이 마지막 기타리스트를 소개했다.


태준이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9화애정 전선 이상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