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모의고사 영어 1등급을 받았을 때가 기억이 난다. 당시 주변 친구들에게 인정받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와 수아 영어 잘하는구나." 참 기분이 좋았고 성취감도 컸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영어 1등급을 받았던 내가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은 큰 비밀이었다. 그렇다 지금부터 영어 1등급이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의 실상을 지금부터 낱낱이 고백한다.
영어 단어 외우기
영어 단어는 1등급을 받는데 절대적이었다. 전에는 한 문제를 푸는데 모르는 단어가 6개 7개였다면, 1등급을 받을 때 즈음에는 전체 시험에서 모르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내 단어량은 많았다. 단어 5000개짜리 단어장을 외웠는데, 일반 시중에 나오는 단어장보다 단어가 2배 많은 수준이었다. 이 단어장 전체를 거의 30번 정도 외웠다. 그렇게 하고 나니 단어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데, 문장으로 써보라고 하면 절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듣기를 할 때도 단어들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역시 어떻게 그 단어를 써야 할지는 전혀 몰랐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영어가 1등급이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즉, 내 마음 깊숙이에는 내 영어가 허접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1등급임에도 절망스러웠었다. 이렇게 1등급이 형편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편한 감정은 계속해서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영어만 해야 하는 게 아니고, 국어도 해야 하고, 수학도 해야 하고, 다른 과목들도 신경을 많이 써야 했기 때문에, 그냥 그 불편한 감정을 억누르고 바쁘게 그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다.
영어 듣기
고등학교 때 내 듣기 실력은 탁월했다. 미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미드랑 비교했을 때 고등학교 모의고사 듣기는 너무 쉬웠다. 얼마나 듣기가 쉬웠는지 듣기 시간에 뒤에 읽기 문제를 절반가량 풀 정도로 집중을 하지 않아도 답을 척척 골라내었다. 듣기는 정말 껌이었다.
그런데, 사실 고백할 것이 있다. 듣기가 쉬웠다는 말은 사실 답을 골라내기가 쉬웠다는 것이지, 그 듣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대화 자체가 쉬웠다는 것은 아니다. 한 번씩 시험이 끝나고 듣기 문제들의 스크립트를 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그 스크립트들의 난이도에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평생 이 사람들처럼 영어를 하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스크립트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감히 내가 이야기하지만, 대한민국 수험생들 중에 듣기에서 나오는 수준으로 말할 수 있는 수험생은 0.0001% 정도 밖에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내 영어 실력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영어 1등급"이었다.
영어 독해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독해가 참 어려웠다. 문제는 정말 잘 풀었다. 그것도 빠르게. 그렇게 100점을 맞고 나서 다시 천천히 지문들을 보면 또 좌절스러웠다. 문제를 풀 정도로는 이해를 했지만, 사실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읽고 나머지는 읽지도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머지를 읽을 실력도 시간도 안됐다. 단 한 번도 영어 시험을 보면서 제 시간 안에 모든 지문을 읽은 적이 없었다. 딱 답 나올 정도만 읽었었다. 심지어는 전체 지문의 윗줄 아랫줄 한 줄씩만 읽고 문제를 푸는 풀이법(?)도 많이 사용했었다. 이건 말하면서도 창피하지만 정말이다.
우리 1등급들이 얼마나 대충 지문을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지 사람들이 안다면 정말 기가 찰 것이다. 지문들이 얼마나 길고 어려운지, 원어민 선생님들도 어려워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제 시간 안에 그걸 다 읽고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웬만한 1등급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괴물 같은 천재들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거의 천재적인 유학파인 경우가 많았고, 일반적인 국내파 1등급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가 막히게 지능적으로 문제를 빨리 잘 푸는 기계들이었다.
영어 말하기
영어 말하기는 시험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았다. 자신도 없었고, 언제나 '나도 유창하게 영어를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은 했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였다. 왜냐하면 너무 정신없이 바빴다. 화장실에 소변보러 갈 때도 단어장을 들고 외우면서 다닐 정도였고 하루에 수학만 5시간 정도 공부를 해야 했기에, 나머지 과목들까지도 공부를 매일 해나가려면 정말 바빴다.
즉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공부를 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영어 말하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극히 드물었다. 영어 1등급 학생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영어 말하기 수준은 1등급이나 6등급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항상 어디 가서 영어 1등급이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었지, 얼마나 내 영어가 형편없었는지 이야기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한국 영어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들은 국제 사회에 설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답은 참 잘 골라내지만, 제시되는 문장들과 표현들을 이해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제로였다. 참 절망스러웠기에 그 절망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한국 토박이들의 영어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