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바다에서 헤엄치기

by 하루

짐 캐리는 훌륭한 배우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 트루먼쇼의 트루먼. 우스꽝스러운 표정 속에 어린 슬픔을 그렇게 쓸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라니.. 98년 개봉작이니 24년 전이다. 그때 영화 밖 현실에서도 트루먼쇼가 판을 치게 될 줄 예측 못했던 걸 보면 벼린 날을 가진 예리한 트렌드 리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트루먼은 타의에 의해 쇼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의로 트루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세상이 올 줄이야. (’ 4차원 가족 카다시안 따라잡기’라는 사생활 대 방출 프로그램이 2007년부터 방영되었다는 걸 최근에 책을 읽다 알게 되어 촌스럽게 놀람. 남의 집 사생활을 15년이 넘도록? 왜? ) 가장 내밀한 개인의 삶을 온 세상이 다 구경하도록 쇼 하는 세상. 어딘지 가학적이다. 아니다 관음증과 노출증의 기묘한 콜라보, 가학과 피학이 구분하기 어렵게 뒤엉킨 마법사의 불길하게 부글거리는 수프 같다. 효과도 성분도 확신할 수 없는 불길한 수프는 전파를 타고 관음 욕을 부추기며 무서운 속도로 전 세계를 향해 스멀스멀 흘러간다. 그 걸 보고 따라잡기를 하든 심심풀이 땅콩처럼 씹든 세상에 나선 이름은 쇼를 소비하는 대중의 손에 맡겨질 운명이다. 대중의 손에 이름을 쥐어 주고 익명성을 포기한 대가로 돈을 번다.(이름도 얻는다. 有名해진다.)


식당에서 친구와 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불현듯 깨닫는다. 옆 테이블도 뒤 테이블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당연한 거 아냐) 누군가 아무도 이런 시시한 얘기를 하고 있는 날 몰라봐 줘서 고마워요.(고마워할 일인가) 그렇고 말고. 대신 좀 가난하다(상대적으로, 가난은 대부분 상대적이므로). 대신 타인의 집요한 관심으로부터,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바라며 프랑스에 샤토를 살 필요가 없다. 익명을 포기하고 유명을 얻어 번 돈으로 샤토 넓이만큼의 자유를 산다.(샤토를 살 정도면 자유를 포기할 수 있나. 바보. 돈으로 익명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좋은 자유를 살 수 있다고!! 더 좋은 자유란 것도 있나? “더”라는 것에 방점이 찍히면 답이 없다. 무한의 루프에 갇힌다.)


사실 완벽히 익명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노출해야 하는 기명의 순간들이 있다. 노출은 점점 더 잦아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도 이뤄진다. CCTV와 방역 패스, 휴대폰 위치 추적, 마이 데이터, 뉴럴 링크…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인 익명의 바다 그 영해가 시나브로 좁아지고 있는 걸 느낀다. 갈수록 트루먼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가고 있는 요즘 자주 영화 속 짐 캐리의 페이소스 가득한 얼굴이 생각난다. 기왕 이렇게 익명으로 살 확률이 낮아지는 마당에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온 시대가 등 떠밀고 광고하는 유투버로 나서야 하나(뭘로.. 행여나). 게으르고 심지어 모든 대세 시류를 일단 색안경 끼고 보는 성향인 나는 아무래도 어렵겠다. 살면서 가장 나중에 포기해야 하는 것 하나를 고르라면 그 건 자유. 지금도 자유의 많은 부분을 자의, 타의 포기할 때가 있지만 포기한 그만큼 삶의 감각에 둔해진다. 그래도 익명의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는 자유, 그 사소하고도 예민한 기쁨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 돈을 받지 않고도 그 자유를 다 내주어야 할 그런 날이 올 수밖에 없다는 슬픈 예언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혼자 상상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의 화원은 필요하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그곳에 누구도 들여놓지 않을 자유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생각하므로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바란다.(정말?)


그런데 문득 트루먼의 표정과 함께 데블스 에드버킷 알 파치노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Vanity is definitely my favorite scent” 왔다 갔다 하는 나에게 하는 말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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